복건성의 관문이라는 통선문. 길이가 24m로 무척 길다 사진=진선희기자 섭방관~포성현까지 건녕부 경유 긴 강 위에 아홉 간 석교 등 묘사 주희 머물던 무이산 절경도 소개 통선문을 지나 절강성 이동 추정 조선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이방익은 행차가 지체되자 거듭 글을 올린다. 군사와 행정 등을 총찰하는 최고 직위가 자리한 순무부(巡撫府)에 간청하자 마침내 순검(巡檢) 마승길(馬勝吉, 이방익이 한글로 쓴 자료로 보이는 표해록에는 마송길로 적혔다)에게 호송이 맡겨진다. 1797년 3월 이방익 일행이 호송관을 따라 복건성 서문을 나서 절강성으로 향하는 막바지 길, 건녕부(建寧府)에 다다른다. 통선문 연암 박지원의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에 담긴 이방익의 구술 내용이다. 송환 노정이 간략하지만 '서이방익사' 말미엔 이 여정을 건녕부 섭방관(葉坊館)→건양현(建陽縣) 인화관(仁化館)→서양령(西陽嶺)→만수교(萬壽橋)→보화사(寶華寺)→포성현(浦城縣)으로 부록해놓았다. 건녕부는 지금의 건구(建?,젠어우)시를 말한다. 복건(福建, 푸젠)성이 복주(福州, 푸저우)와 건녕(젠닝)의 머릿글자를 딴 이름이라고 할 만큼 유서깊다. 이방익의 '표해록'(권무일 해제)은 건녕부 섭방관이란 역 주변에서 만난 풍경이 좀 더 길게 묘사되어 있다. 관광객들이 중국의 명산 중 하나인 무이산 계곡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있다. 이방익보다 500여년 앞서 건녕부를 다녀간 이가 있었다. '동방견문록'을 남긴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다. 1275년부터 중국 곳곳을 누볐던 마르코 폴로는 1292년 건녕부에 도착해 3일간 체류했다. 지난달 11일 건구시 통선문(通仙門) 앞에서 이방익 발자취를 더듬고 있는 제주 방문단의 눈에 들어온 건 마르코 폴로 동상이었다. 13세기 마르코 폴로가 건구시의 옛 모습을 꼼꼼히 기록해놓은 점을 잊지 않으려는 등 통선문을 배경으로 커다란 전신 동상이 세워졌다. 통선문은 복건성의 주요 관문이던 곳으로 당나라 때부터 있었다. 현존하는 건축물은 명나라 시기인 1386년 건립됐다. 지금 남아있는 통선문 세 글자는 이방익이 방문하기 직전인 1792년 중수할 때 쓰여졌다. 복건성을 대표하는 성문인 통선문은 높이 6m에 길이가 무려 24m에 이른다. 조선 표류민인 이방익 일행이 복건성 건녕부를 거쳐 절강성으로 걸음을 옮겼다면 마르코 폴로는 쿠주(절강성 신주(信州)로 추정)를 출발해 푸주 왕국(복주)으로 왔다. 마르코 폴로는 "여기서 시작해 동남쪽으로 엿새거리를 가는 동안 도시와 촌락이 있는 산지와 계곡을 지나게 된다"며 "엿새 중에 사흘 거리가 끝나면 켄린푸(건녕부)라는 도시에 이른다"고 했다. 주희가 만년에 거주했던 건양 고정서원 입구. 관광지로 개발하려듯 정비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이방익 일행의 경로를 역추적해보면 표류민들은 통선문에 먼저 발을 디딘 후 위무문으로 나가 절강성 방면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위무문도 현재까지 그 형체가 살아있는 건구시내 5개 성문 중 하나다. 이방익이 표해록에서 소개한 아홉 간의 석교는 어디일까. 마침 '동방견문록'에도 건구의 다리를 적어놓은 구절이 있다. "이 도시에는 가장 뛰어나고 아름다운 다리가 세 개 있다. 길이는 1마일이고 폭은 9보이며 모두 돌로 만들어졌고 난간은 대리석으로 되어있다. 어찌나 아름답고 멋있는지 그렇게 만들려면 많은 돈을 들여야 할 것이다." 뢰소파 주임은 마르코 폴로가 말한 세 개의 다리가 통선교, 만안교, 평정교(平政橋, 또는 통도교)를 일컫는다고 했다. 다리 아래를 흐르는 강은 건계(建溪)다. 이방익도 건녕부를 지나며 석교를 목격했거나 밟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들 다리의 모습은 지난 세월 속에 묻혀버렸다. 한글 표해록에는 이방익이 건녕부에 도착하자마자 "산천이 수려해 그림 속 같았다"며 무이산을 다룬 대목이 나온다. "9개의 봉우리가 연하여 솟아있어 앞뒤를 분별할 수가 없었다"고 덧붙였는데 이는 이방익이 멀리서 조망한 풍경일 수 있다. 송대 주희가 남긴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는 무이정사를 지어 무이산에 노닐며 창작한 시를 말하는데 건구시와 이웃한 건양(建陽)구 고정 마을에는 주자가 만년에 거주하며 강학했던 고정서원(考亭書院)이 있다. 하문에서 시작된 이방익과 주희의 인연은 복건성 북방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자문위원=권무일(소설가)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 글=진선희기자 마르코 폴로의 견문록 만큼 정조가 놀란 이방익 표류기 "주민들은 교역과 수공업으로 살아간다. 비단이 많고, 생강과 방동사니도 많이 자란다. 여자들은 예쁘게 생겼다. 여기서 한 가지 괴상한 것에 대해서 말해보면 그곳에는 털이 하나도 없고 살갗이 고양이같이 생겨 온통 까만색인 닭들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알은 우리나라에서 보는 것과 동일하며 아주 맛이 있다." 마르코 폴로 동상 너머로 통선문 전경이 보인다. 우리에겐 '동방견문록'으로 익숙하지만 원제는 '세계의 서술'이다. 베니스에서 무역업을 하던 상인의 아들이었던 마르코 폴로는 자신의 견문을 토대로 여러 지역에 대한 진기하고 놀라운 것들에 대해 서술했는데 그것이 동방에 국한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은 당시 유럽인들로선 믿기 어려울 만큼 경이로운 이야기가 많았다. 그는 "목도하거나 진실이라고 들은 갖가지 경이를 글로 쓰게 하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것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커다란 죄악이 될 것"이라고 했다. 김호동은 '동방견문록'을 두고 "그의 기록은 유럽을 제외한 다른 나머지 지역에 대한 지리지이고 박물지이며 동시에 민족지"라고 평가했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머문 기간은 17년이었다. 그는 13세기 후반 중국 항주의 모습 등 어느 사료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도시와 도시 사이의 거리나 방향, 각지의 특산물을 '사진기와 같은 기억력'의 소유자처럼 적어나갔다. 중국의 강남 지역 등 미지의 세계를 생생하게 전해준 이방익의 견문기 역시 정조에게 놀라움이었다. 연암 박지원을 불러 이방익의 표류에 관한 글(서이방익사)를 지으라고 명령을 내린 이유다. "전라 중군 이방익을 소견하니, 사람의 됨됨이가 매우 똑똑하고 그가 하는 말을 들어 보아도 장관이라고 할 만했다. 같은 배를 탄 여덟 사람이 3만 리 길을 무사히 갔다가 돌아왔으니 다행스럽다. 그리고 자양서원, 자릉조대, 악양루, 금산사 같은 곳을 모두 돌아다녔다고 하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일성록(日省錄))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이 기사는 한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ihalla.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webmaster@ihall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