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서파의 고산식생대. 하얀 눈처럼 빛나는 백두산 정상이 멀리 보인다. 한라-백두 탐사 핵심은 식물 산림훼손·기후변화로 위기감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동북아시아 최고의 식물 저장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대에서부터 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식물자원을 뺀 백두산은 상상할 수 없다. 일제가 백두산이 접해 있는 옛 만주지방을 탐냈던 속셈도 바로 이곳의 풍부한 산림자원에 있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백두산 정상부를 제외한 용암대지의 거의 모든 지역이 일망무제 밀림으로 덮였다. 만병초와 들쭉나무와 같은 키작은 관목들은 용암대지의 가장 낮은 지대에서부터 최정상부까지 크고 작은 군락을 이룬다. 백두산은 아직까지 넓은 면적의 인위적 간섭이 배제된 원시상태의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세계적인 자연 생태지역의 하나이다. 이런 백두산과 그 자락의 산림자원은 영원할 것인가. 불행히도 이 같은 전망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하다. 산림훼손과 더불어 최근에는 또 다른 복병이 위협적이다. 바로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다. 이는 탐사단이 지난 8월 26일 장백산자연박물관을 방문 박물관 및 장백산과학연구원 관계자와 향후 교류협력 모색을 위한 간담회에서도 확인됐다. 이 자리에서 황상동 장백산과학연구원 부원장은 "장백산도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계 변화가 뚜렷하다. 해발 1300~1400 고지의 분비나무가 많이 고사하고 있으며 하층식생들이 고산으로 이동하고 있다. 과거 주택 지붕을 잇던 저지대 식물들이 고산식물을 잠식해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한라산 상황과도 유사하다. 기후변화 등으로 서식지가 급속히 쇠퇴하고 있는 한라산 구상나무림의 분포면적이 최근 10년 동안 112.3ha가 감소한 것으로 밝혀졌다. 10년간 한라산 구상나무림 서식지 15.2%가 사라진 것이다.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과 제주도는 구상나무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이 뿐이 아니다. 한라산 생태계는 조릿대와 억새로 뒤덮이면서 종다양성이 위협받고 있다. 소나무재선충병도 언제 번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김찬수 박사(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는 "한라산과 백두산의 온난화에 따른 생태계 변화 공동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국내 과학계에서는 남북 정상회담에 이은 교류협력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자 백두산과학기지 설립 제안도 잇따르고 있다. 광물자원뿐만 아니라 백두산의 다양한 고산식물자원에 대한 조사와 식물속 유용자원을 찾자는 취지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이미 천지연구소를 벤치마킹해 한라산연구소를 출범시킨 선례가 있다. 한라-백두 공동탐사의 핵심은 식물자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유용자원 연구와 온난화에 따른 생태계 변화 등에도 남과 북이 지혜를 모을 수 있다. 특별취재팀 [전문가 리포트] 식물 수직분포 뚜렷… 종 다양성 공통점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식물의 천연분포에는 기온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다음으로 기여하는 조건은 수분수지라고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온도가 높고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은 종 다양성이 높고 춥고 건조한 곳은 그 반대이다. 한라산은 해발 1950m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백두산은 2750m로 북한에서 제일 높다. 한반도를 포함한 중국의 동북삼성을 통틀어도 이보다 높은 산은 없다. 한라산은 백두산과 달리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섬이다. 기상 기후적으로 영향을 미칠만한 산이나 그 밖의 고지대는 없다. 그러므로 기온, 강수량, 바람, 증발량 등은 오로지 대기의 영향을 받을 뿐이다. 대륙의 동쪽에 위치해 편서풍을 받고, 해양에서 불어오는 기류를 맞이한다. 대륙성이면서 해양성 기후인자의 영향을 두루 받는다. 백두산은 대륙에 있는 산이지만 독립적인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주위를 둘러봐도 영향을 미칠만한 지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로 대륙성 기후 영향을 받는다. 이런 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기기묘묘한 자태를 보여주는 금강대협곡의 침엽수림. 이에 비하여 한라산은 연평균 기온 4.47℃, 7월 평균기온 16.2℃, 1월 평균기온 -7.8℃, 연평균강수량 5,107㎜다. 이렇게 보면 한라산의 정상은 기온에 있어 백두산의 해발 1,100 m 정도보다 따뜻하다. 이 정도 높이의 백두산은 연평균기온 -0.4℃, 7월 평균 17.7℃, 1월 평균 -21.3℃다. 이러한 기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라산이 백두산처럼 수직분포 패턴이 뚜렷한 것은 고립봉이면서 화산지질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강수량이 풍부하다고는 해도 바로 건조해지는 특성으로 고지대일수록 크게 자라는 온대성의 식물들이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이 된다. 침엽수림은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잣나무, 이깔나무들이 섞여 자란다. 해발 500~1100m는 잣나무 혼성림대이다. 잣나무, 전나무, 잎갈나무가 주로 자라고 있는데 잣은 이 지역 주민들의 소득 중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낙엽수로는 자작, 황철나무, 가래나무 등이 많이 자란다. 한라산은 이와 대응하는 산림대는 없다. 해발 1300~1500m가 어느 정도 유사한 정도다. 해발 1100~1700m는 침엽수림대이다. 가문비나무, 전나무, 잣나무, 종비나무, 분비나무, 잎갈나무 등 침엽수들이 주로 자라는데 나무높이가 30m 달한다. 지하삼림이라고 하는 지역이 잘 알려졌다. 해발 1700~2000m는 산지떨기나무림대 또는 산지 사스래나무림대라고 하는데 현지에서는 악화림대라고 소개하고 있다. 주로 사스래나무가 자라고 있다. 한라산인 경우는 구상나무를 위주로 하는 침엽수림대와 사스래나무림대가 한 지역에 섞여 있다. 해발 2000m 이상은 고산태원대 또는 산지늪지대라고 한다. 즉, 해발 2000m가 교목한계선이다. 크게 자라는 나무가 더 이상에는 없다는 뜻이다. 노랑만병초, 담자리꽃나무, 들쭉나무 등 키 작은 관목들이 자란다. 한라산 해발 1600m 이상 선작지왓에서 정상까지 펼쳐진 관목림대와 초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상은 중국학자들이 조사한 내용을 참고한 것이다. 북한 지역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1989년 조사한 바 있다. 그들은 백두산의 수직분포대를 한대성 식물군락과 아한대성 식물군락으로 크게 나누었다. 이 중 저지대인 아한대성 식물군락을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숲 군락, 이깔나무 숲 군락, 바늘잎나무 잎지는 나무에 섞인 숲 군락의 3개 군락으로 나누었다. 한대성 식물 군락은 다시 높은 산초원 군락과 높은 산떨기나무 군락으로 구분했다. 북한쪽인 남사면과 중국쪽인 북사면이 식생의 분포에도 차이가 있지만 나누는 기준이나 방식도 다른 것이다. 백두산에는 134과 1599 종이 분포하고 있다. 한라산에는 193과 1969 종이 자란다. 백두산은 고산식물들이 많지만 한라산은 아열대성 식물들이 다수 포함된 것이 차이를 크게 하는 요인이다. 양치식물도 백두산이 81종에 불과한데 한라산은 200종이나 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들은 이미 조사한 지 오래된 데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직접 비교는 무리가 있다. 앞으로 남북한은 물론 중국의 관련학자들의 공동연구가 시급히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하늘 아래 첫 동네' 내두촌 백두산 자락에 40여세대 조선족 옹기종기 백두산 속 해발 1200m 지점에 조선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내두마을은 '하늘아래 첫 동네'라 불리는 곳이다. 탐사단은 지난 8월28일 2000년 이후 18년 만에 이곳을 찾았다. 내두마을 이름은 내두산에서 짐작할 수 있다. 마을로 향하는 길 양쪽에 위치한 두 개의 산이 마치 여성의 가슴과 같다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하늘아래 첫 동네'라 불리는 내두마을 전경. 장백산자연박물관 박용국 전 관장의 안내로 이 마을 촌장 집을 찾았다. 촌장(전호산, 56)은 이도백하진으로 출장가 없고 그의 아내 정춘자(54)씨가 우리 일행을 맞았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조선족인 정춘자씨. 그래도 행복해 보였다. 조선족 전통 양식의 가옥에 현대식 살림살이를 갖추고 이웃과 오순도순 정겹게 살아가고 있다. 주택개량은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이뤄졌다. 안방에는 한국 TV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이 정씨네 집에서 촬영된 사진이 걸려 있다. 내두촌은 1860년을 전후해 함경도 일대 지독한 흉년으로 기아에 허덕이던 조선의 농민들이 백두산 허리를 넘어 경작지를 찾아 온 곳이다. 농사와 사냥을 하면서 살았다. 그 후 일제 강점기에 만주지역의 항일운동 열기가 거세어지자 백두산 밀림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항일투사들의 은신처가 되었으며 일제에 맞섰다. 이곳에 있는 '항일유격근거지기념관'이 그 역사의 일단을 들려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도 '등 시리고 배가 고파서' 조국 땅을 버리고 이국 땅으로 왔다. 해방 후에도 고향의 식량 사정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들의 2, 3, 4세대들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특별취재팀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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