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배엔 64명이 탔었다. 당시 제주 대정현 해안가 어디쯤 난파했을 때엔 그중에서 36명이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끝끝내 살아남아 고향 땅을 밟은 이는 그 절반도 안되는 16명에 그쳤다. 1653년 8월 16일 제주섬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을 말한다. 하멜이 승선했던 스페르웨르호는 암스테르담 연합동인도 회사 소속으로 일본으로 향하던 중에 제주에 표류한다. 하멜 일행은 표착 직후부터 약 1년 9개월 동안 제주에 머물렀고 서울로 압송돼 훈련도감에 배치된다. 조선을 탈출하려고 시도하다 전라도에 유배되는 일도 겪는다. 그들은 13년 만에 조선을 떠날 수 있었다. 이방인에게 호의를 베푼 조선 사람도 있지만 그 긴 세월을 이역에서 보낸 하멜과 동료들은 부역에 시달리고 노예 같은 삶을 꾸역꾸역 이어갔다. 낯선 외모는 때때로 구경거리가 되었다. 시인인 신덕룡 광주대 교수는 어느 초겨울 전남 병영에서 하멜 동상을 맞닥뜨린 뒤 열병을 앓았다. '하멜 표류기'로 알려진 '하멜 보고서'를 단숨에 읽어내려가며 조선에 억류돼 처참한 생활을 했던 하멜의 모습을 쉬이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몇 년 동안 하멜의 인격으로 살았다는 시인은 시집 '하멜서신'을 묶어내기 전 유럽으로 떠났다. 이제는 그만 하멜에서 벗어나기 위해 택한 여행이었다. '하멜의 다락방'은 그 여정을 담아낸 에세이다. 시인이 처음 발디딘 곳은 네덜란드가 아닌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유대인들의 지식과 경험이 네덜란드를 강국으로 만들었다는 역사적 배경이 작용했다. 그는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의 흔적을 더듬은 뒤 하멜의 고향 호르큼(호린험)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암스테르담까지 비행기로 11시간이 걸렸고 거기서 다시 열차를 타고 당도한 곳이다. "17세기엔 이 길을 오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까." 이같은 상념에 잠기며 하멜 하우스를 둘러본 시인은 또 한번 하멜의 외로움과 고통이 몸 속으로 스미는 순간을 경험한다. 호르큼으로 가는 길목 곳곳에서 불안과 마주해야 했던 시인은 "하멜은 외로운 존재로서의 '나'의 다른 이름"이었다고 말했다. 400여년 전 유럽을 추체험하는 일기체 형식의 기행문 곳곳에 시와 그림이 더해졌다. 문학들. 1만3000원. 진선희기자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이 기사는 한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ihalla.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webmaster@ihall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