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의 황토고원. 강수량이 풍부해 강과 호수가 많은 남방에 비해 북방은 건조하고 처원이 많다. 시대 따라 북·남방 개념 달라 남방 개념 남쪽 하향화 경향 장강 경계서 남령 아래 남방 지리환경 결정론 영향 유사배 남북 문화론의 토대 만들어 차이 있지만 차별 의미 아냐 '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에 "귤이 회하淮河를 건너 북으로 오면 탱자가 되고, 앵무새는 제수濟水를 넘지 못하며, 오소리는 문하文河를 넘으면 죽고 만다. 모든 것이 땅의 기운 때문이다."라고 했다. 북방의 토양은 황토와 흑토인데 주로 기장(서직黍稷), 고량, 대두, 백면을 주식으로 삼았다. 농경을 위해 많은 이들이 함께 힘을 합쳐야만 했고, 이를 통해 협력정신, 호방하고 강건한 정신이 진작되었다. 붉은 색을 띠는 남방의 토양과 풍부한 수량으로 남방인들은 대미大米(쌀)가 주식이었다. 논농사는 굳이 많은 이들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넉넉하게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함께 모여 무엇인가를 도모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넉넉한 소출량으로 인해 굳이 애쓰지 않아도 생을 영위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남방은 강수량이 풍부하여 강과 호수가 많고 북방은 반대로 건조하고 초원이 많다. 그래서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이 생겼다. 강남 수향(水鄕)의 오봉선(烏蓬船). 중국은 세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인 영가지란永嘉之亂(307~312년), 안사지난安史之亂(755~763년), 정강지난靖康之亂(1126~1127년)을 계기로 문화의 중심이 북방에서 남방으로 천이遷移되었다. 세 번의 난리로 말미암아 북방의 왕실, 귀족은 물론이고 일반백성들 또한 이삿짐을 싸서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는데, 이것이 남방의 문화를 크게 발전시키는데 큰 동력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북방 사람들이 남방으로 이주하게 된 근본 이유는 경제적인 것이다. 북방의 자연은 지금처럼 황폐화하지 않았다. 하상주가 자리한 황하 중류(하남, 섬서성 일대)는 본래 풍부한 산림과 수원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문명 발전은 다른 한편으로 자원의 고갈이라는 대가를 요구했다. 문화의 중심지라는 명예는 새로운 왕조를 꿈꾸는 이들의 전쟁으로 얼룩져야만 했다. 자원의 고갈, 산림의 황폐화는 수자원의 고갈로 이어졌다. 이미 기원전부터 이루어진 관개 사업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수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가뭄과 병충해 등 자연재해로 인해 기근에 허덕이는 이들은 '한서'에서 말했다시피 식인食人도 마다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듯 북방이 황폐화되고 있을 때 남방은 점차 수많은 인구가 유입되면서 개발되기 시작했고, 점차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진 왼쪽청두(成都) 삼성퇴(三星堆)의 황금가면. 서남이(西南夷)로 칭해졌던 지금의 사천성 일대에는 황금가면으로 유명한 파촉(巴蜀) 문화가 자리했다. 오른쪽은 홍산문화유적지 출토 옥룡(玉龍). "강동江東 부녀는 외부 사람과 교류하는 일이 거의 없다. 심지어 친가조차도 때로 수십 년 간 왕래하지 않고, 그저 사람을 보내 예물을 전달하여 은근한 정을 전달할 따름이다. 그러나 업하(지금의 하남성 일대) 풍속은 달라 집안일을 모두 부녀가 하는데, 곡직曲直을 따지기 위해 소송을 하거나 손님을 초청하고 환송하는 일까지 모두 도맡는다. 마차를 탄 부녀들이 거리와 골목마다 가득하고, 비단옷을 입은 부녀들이 큰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 아들을 위해 관직을 구하거나 남편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는 항주恒州와 대군代郡의 북위北魏 유풍인가? 남방은 가난할지라도 외면적인 치장을 중시하여 거마나 의복이 모두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그래서 집안의 처자들은 춥고 배고픔을 면할 수 없다. 하북의 인사人事(교제)는 주로 부녀가 주로 처리하는데, 능라 비단이나 금은 비취가 빠질 수 없는 물건이다. 하지만 집안에 있는 말이 비루먹은 듯 마르던 노복들의 얼굴이 누렇게 뜨던 간에 전혀 개의치 않고 그저 숫자만 맞으면 될 뿐이다. 부부지간에 부창부수夫唱婦隨의 예는커녕 서로 무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북 일대의 부녀들도 방직을 자신들의 일로 생각하지만 비단에 수를 놓고 바느질하는 솜씨는 강동의 부녀를 따라갈 수 없다." 근대에 들어와 남방과 북방의 지리적 차이에 근거하여 남북 학문의 차이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이는 유사배劉師培이다. 그는 '국수학보國粹學報' 제 9기에 실린 '남북학파부동론(南北學派不同論)'('유사배학술논저', 절강인민출판사, 1998)에서 남북 학문의 차이를 논구한 바 있다. 그는 황하 유역을 북방, 장강유역을 남방으로 통칭하여 남북의 정확한 분계를 설정하지는 않았지만 지리환경 결정론의 창시자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확장에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몽테스키외의 '지리환경 결정론'의 영향을 받아 지리적 차이가 학술 문화의 차이를 불러왔다는 점에 착안했다. 그의 논의는 이후 남북 문화론의 시발이자 토대가 되었다. 이렇듯 남방과 북방은 차이가 있지만 그것이 차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상서尙書'에 이르길, "북방 사람이면서 남방 사람의 모습을 가진 자, 남방 사람이면서 북방 사람의 모습을 가진 자가 귀한 상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옳다. <심규호·제주국제대학교 석좌교수>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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