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들 구주를 천하로 여겨 천원지방 관념서 천하관 태동 비단길 열려도 관념 요지부동 문제는 과연 당시 그들이 생각하는 천하가 무엇이냐는 데에 있다. 아직 세계의 진면목을 알지 못한 상황에서 고대 사람들이 생각하던 천하는 구주九州였다. 구주는 기주冀州(하북), 연주(산동), 청주靑州(강소), 서주徐州(호북), 양주揚州(호남), 형주荊州(하남), 예주豫州(사천), 양주梁州(섬서), 옹주雍洲(산서)를 말한다. '상서' '우공禹貢'에 나오는데, 우 임금이 치수에 관심을 두었던 곳이라 하여 우역禹域이라고 부른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의 산해도. 이러한 천하관은 근본적으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관념에서 나왔다. 둥근 하늘에 움직이지 않는 정점은 북극성이고, 땅은 네모지니 당연히 그 중앙에 임금이 있지 않겠는가? 이렇듯 구주이든 구복이든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하는 그들이 지배하는 모든 지역, 즉 중국中國(서주西周 경기 지역), 중원中原이자 세상 전체였던 것이다. 물론 이를 의심한 이들도 있었다. ▲남경박물관 소장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인들도 자신들의 세상 밖으로 나가고 또한 세상 밖의 사람들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한나라 무제의 명을 받은 장건張騫은 사신으로 서역西域에 나갔다가 대원大宛(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분지), 강거康居(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남부), 대월지大月氏(파미르고원 서쪽), 대하大夏(아프가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에 접해 있는 박트리아), 오손烏孫(천산 산맥 북쪽), 안식安息(이란), 신독身毒(인도) 등 여러 나라를 다녀왔다. 비단길의 시작이다. 당대에는 일본과 조선의 사절들이 쉼 없이 오고갔다. 구주도. 세계의 진면목을 알지 못한 상황에서 고대 사람들이 생각하던 천하는 구주였다. 방대한 대륙 자체서 자급자족 "영국 물건은 필요한 것 없어" 아편전쟁 그들만의 세계관 균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중국은 지리적으로 고립된 나라이다. 동쪽과 남쪽은 바다, 서쪽은 산과 사막으로 막혀 있다. 유일하게 통할 수 있는 북쪽은 스스로 만리장성을 쌓았다. 사방이 막혀 있으니 인식이나 관념 또한 막힐 수밖에 없다. 물론 나갈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천산산맥 남쪽과 북쪽, 그리고 동해와 남해 쪽으로 육로와 해로의 비단길이 뚫려 있다. 만리장성 역시 동쪽 산해관山海關에서 서쪽 가욕관까지 대표적인 13관을 비롯하여 수십 개의 관문이 자리하고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 문을 나서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이렇듯 고립되었으나 중국은 자체로 방대한 대륙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자체로 능히 자급자족할 수 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1792년 영국 국왕 조지 3세는 매카트니 훈작을 특명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건륭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전달토록 했다. 영국인의 거주와 상업 및 무역, 개항을 위한 조약 체결이 목적이었다. 건륭제는 이렇게 답했다. 1792년 영국 매카트니 훈작이 건륭제를 알현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셋째, 중국인들에게 천하관은 국가의 경계로서 지리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 공간 개념이었다. 다시 말해 천하의 중심에 있다는 중국인들의 천하관이 바로 그들의 세계관이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자부심과 오만감에 결정적인 충격을 준 것은 명대 만력제 시절 이탈리아에서 온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산해여지도山海輿地圖'였다. 중국에서 인쇄한 최초의 서양식 세계지도였다. 하지만 만력제는 그 지도가 의미하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오히려 이를 근거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라는 병풍을 제작토록 했다. 천조는 천하의 중심에 있다는 그들만의 세계관은 1840년 아편 전쟁이 발발한 후에야 비로소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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