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의해 형상화된 '사' 이미지 인재는 부국강병 뒷받침할 자원 제나라 직하에 학자가 1000여명 사士는 원래 주나라의 천자와 제후, 경대부 아래 말단을 차지하고 있는 귀족이자 통치계층이다. 통치계급이기는 하나 종실귀족이 아니기 때문에 세습되는 식읍이나 작위가 없어 자신의 능력만으로 생존해야 하는 고달픈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仕, 즉 벼슬을 얻어야만 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며, 그것이 아니라면 일반 서민들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이유로 사는 봉록을 받는 하급관리로 중앙 정사를 보좌하는 원사元士와 주로 경대부의 읍재邑宰를 맡았던 상사, 중사, 하사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 즉 관직이나 봉록이 없는 사민士民으로 나뉜다. 주희朱熹는 전자를 '유명지사有命之士', 후자를 '무명지사無命之士'라고 구분했다. 제나라 선왕의 화상. 첫째, 누구나 동등하게 배울 자격이 있다. "가르침이 있을 뿐 차별이 없다(有敎無類)". ('위령공衛靈公') 둘째, 인격수양이 먼저이다. "제자弟子(젊은이)들은 집에선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가서는 어른들을 공경하며, 말과 행동을 삼가하고 신의를 지키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사람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 제나라 직하학궁 상상도 나라에 도가 있는데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는데 부하고 귀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태백泰伯') "돈을 버는 것과 벼슬을 하는 것은 모든 이들이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정당한 방법으로 얻지 않으면 군자는 처하지 않는다. 빈궁과 비천은 모든 이들이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정당한 수단으로 얻지 않으면 피하지 말아야 한다."('이인') 여섯째,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적 성취를 위해 학문하라!"('헌문憲問') 이렇게 해서 공자에 이르러 '사'는 말단 귀족이 아니라 사회를 떠받치는 동량이자 사회가 썩지 않도록 하는 지식인이 되었다. 누구나 '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이상적인 인격으로서 군자를 지향하는 '사'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자에 의해 형상화된 '사'의 이미지는 중국 봉건사회 내내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는 유학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끊임없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의 '사'는 유사儒士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국시대의 제자백가에 유가만 있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전국戰國시대는 말 그대로 제후국들끼리 싸우고 또 싸우던 시절이다. 모든 나라가 부국강병富國强兵에 목을 매달았으니 이를 뒷받침할 인재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래서 제후들은 적극적으로 세상의 인재를 초빙하고자 애썼다. 당연히 유가는 물론이고 묵가나 법가, 도가, 농가農家, 종횡가縱橫家, 병가兵家 등 여러 학파가 각기 사학을 설립하여 제자를 길러냈다. 이렇게 해서 싱크탱크인 모사謀士, 전문적인 무예집단인 무사武士, 각국을 종횡으로 누비며 유세하거나 문장을 통해 주군을 보좌하는 사인들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문제 때에 찰거·징벽제도 시행 추천자 주변 인물 천거 등 문제 구품중정제 대체해도 한계 여전 사의 쓰임은 자신의 학식이나 재능을 발휘하는데 있다. 발휘하려면 선택이 되어야 한다. 진시황은 봉건제 대신 군현제를 통한 직접 통치를 시도했다. 자연스럽게 귀족계층이 사라지면서 사 역시 말단 귀족으로서 작위가 없어지고 말았다. 시황제 이전 진나라는 상앙商앙이 변법을 시행할 때부터 군공에 따라 관작을 주고 등용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심지어 "종실 사람도 군공이 없으면 족보에 넣지 않는다."('사기·상군열전')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군공제軍功制가 아마도 진시황의 천하 통일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한나라 역시 초기에는 진을 본받아 군공에 따라 후侯를 봉하고 관작을 내렸다. 이후 평화 시기가 계속되면서 농사를 지어 거두어들이는 양식의 양에 따라 관작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文帝 때에 이르러 군국郡國의 열후와 지방장관에게 치국의 재능이 있는 '현사대부賢士大夫', 즉 "현량방정하고, 직언과 극간을 할 수 선비(賢良方正, 直言極諫之士)를 천거하여 주상이 친히 책문策問하여 훌륭한 대책對策으로 받아들이겠다."('문제 15년 조서')고 하면서 이른바 '찰거察擧(살펴서 천거함)'라는 독특한 추천제를 시행했으며, 아울러 보완책으로 위에서 살펴 선발하는 '징벽徵피'제도를 시행했다. 사가 관리가 되는 것도 어렵지만 사를 제대로 선발하는 일 또한 심히 어려웠다.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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