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문형순 등 사연 절절 후손들 대부분 기초수급자 제주4·3사건이 발발한 이듬해인 1949년 1월 모슬포경찰서장에 이어 같은 해 10월 성산포경찰서장으로 부임한 문형순 서장은 1950년 8월 계엄사령부의 총살 명령에 '부당하므로 불이행'한다고 서명하고 거부했다. 전시 하극상으로 보일 수 있는 이러한 명령 거부 행위로 총 295명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시 전국을 휩쓴 예비검속으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지만 성산포경찰서 관할구역 희생자는 전국에서 가장 적은 6명에 그쳤다. 신흥무관학교를 나와 일제와 싸웠던 독립군 출신의 문형순이 광복 후 군경 요직을 차지한 일본군 출신들에게 호락호락했을리 없다. 1919년 3월 신흥무관학교 속성과를 졸업한 문형순은 지청천의 서로군정서에 편입돼 활동하다 1920년 일제의 간도 토벌 당시 위기를 맞았다. 서로군정서군은 토벌을 피해 남만주 방면으로 이동한 뒤 1920년 9월 백두산 방면으로 건너갔으며, 김좌진 부대에 참가해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 승리에 공헌했다. 청산리대첩에 참가한 그는 이후 고려혁명군 사관학교 교관을 거쳐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고, 고려혁명군 해체 후에는 적기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다시 신민부에 이어 국민부 소속으로 만주에서 활동하던 그는 만주사변 이후 하북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이어가다 광복을 맞아 1947년 경위(제주청 기동경비대장)로 경찰에 입문했다. 의로운 독립군 출신 경찰로 군대와도 맞서는 사람이라고 하여 '문 도깨비'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1953년 퇴직한 뒤에는 쌀 배급소와 극장 직원 등의 일을 전전하다 1966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죽인 친일경찰 노덕술이 6·25 전쟁 영웅으로 둔갑해 국가보훈처로부터 무공훈장을 받았지만 문형순은 제주보훈청 등이 여러 차례 독립운동가 서훈을 신청해도 실현되지 않았다. 후손이 끊겨 건국훈장을 대신 받을 직계도 없다. 저자는 지난 6년간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가는 독립운동가 후손 514명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이 책 '독립운동 맞습니다'를 펴냈다. 평균 연령 70대인 이들이 전하는 마지막 목소리는 "우리를 잊지 마세요"였다. 정상규 지음. 아틀리에북스. 1만6000원. 표성준기자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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