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사를 떠난 이방익 일행 소주 대표적 사찰 한산사로 호구사와 비교 웅장함 기록 장계 시 ‘풍교야박’으로 유명 사찰 내부는 온통 시인 장계(張繼)가 쓴 시로 뒤덮여있었다. '풍교야박(楓橋夜泊)'이다. '달 지고 까마귀 우는데 하늘엔 서리 가득(月落烏啼霜滿天)/ 강가 단풍나무와 배의 등불 바라보다 시름에 겨워 잠드는데(江楓漁火對愁眠)/ 고소성 밖 한산사(姑蘇城外寒山寺)/ 한밤중에 울리는 종소리 객선까지 들려오누나(夜半鐘聲到客船)'란 시의 구절이 탁본이나 빗돌에 새겨져 곳곳에 놓여있었다. 소주의 대표적 사찰인 한산사를 찾은 관광객들이 추억을 남기고 있다. 한산사 경내에 세워진 장계의 시 '풍교야박'을 새긴 빗돌 그들은 호구사를 떠나 한산사 앞에 배를 매고 절문으로 들어간다. 이방익은 호구사와 비교해 한산사의 인상을 적어놓는다. "이 절은 평지에 지었지만 웅장함은 호구사와 마찬가지이고 누른 기와로 이었으며 단청이 찬란하지만 금탑은 없었다." 한산사 곳곳에는 '풍교야박'을 여러 글씨체로 써놓은 작품을 볼 수 있다. 이방익의 발자취를 따라나선 탐방단이 한산사에 도착했을 때도 사찰 입구부터 방문객들로 빼곡했다. '풍교야박' 시구가 적힌 빗돌 앞에서 사진을 촬영하며 추억을 남기거나 연못을 유영하는 물고기들을 보며 봄날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금산사 꼭대기에 오르면 사찰 건축물 너머로 시원한 풍경이 안겨온다 높이 100여장 석산은 어디? “금산사 세워진 금산 아닐까” 1797년 음력 4월 25일 이방익 일행은 소주를 떠나 양주(楊州) 강도현에 이른다. 그가 이번에 발디딘 곳은 진강(鎭江)에 있는 금산사(金山寺)다. "가운데 석산이 있는데 높이가 100여 장이요 둘레가 3~4리나 되었다. 돌기둥을 가로 끼어 세우고 돌을 다듬어 마루를 놓고 30여 간 집을 그 위에 지었는데 이는 금산사라는 절이었다. 풍경 14개를 절 4면에 달고 목인(木人) 14개를 만들어 종경 곁에 세웠는데 법당 위에서 목인이 때를 기다려 머리로 풍경을 받아치면 남은 목인이 차례로 받아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가 청아하여 막대로 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 조금도 시간을 늦추지 않으니 그 조화가 신기묘묘하였다." 금산사 계단을 오르는 방문객들 "금산사는 오색의 채와(彩瓦)로 지붕을 덮었으며 절 앞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는데 높이가 백 길은 됨직하고 섬돌을 5리나 빙 둘렀으며, 이층 누각을 세웠는데 아래층은 유생 수천 명이 거주하면서 책을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고 있고 위층에는 노랫소리 피리소리가 하늘을 뒤덮었으며,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잡고 열을 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석가산 위에는 십자형의 구리기둥이 가로놓이고 석판으로써 대청을 만들었으니 바로 법당이었으며, 또 종경(鍾磬) 14개가 있는데 목인이 때에 맞추어 저절로 치게 되어 있어 종 하나가 먼저 울면 뭇 종이 차례로 다 울었습니다." 청나라 강희황제가 금산사에서 바라본 장면을 보고 감동하며 썼다는 '江天一覽(강천일람)'. 그로부터 220여 년 뒤 탐방단이 찾은 금산사는 사찰 입구 '금산' 편액으로 그 존재를 알렸다. 옛 모습은 희미했지만 계단을 오르고 올라 꼭대기에서 바라본 경치는 이방익이 봤을 그대로인 듯 했다. 권무일 작가는 이방익이 표현한 석산, 연암이 적어놓은 석가산이 바로 금산이라는 의견을 냈다. 금산사 뒤편으로 가서 산의 형상을 본 권 작가는 "돌을 켜켜이 쌓은 다음 흙을 다져 올렸고 다시 그 위에 돌을 쌓은 인공산 즉 석가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소주나 양주는 대부분 토사가 퇴적된 땅이어서 구릉같은 낮은 산이 있거나 운하를 판 흙으로 쌓은 인공산이 많다. 그래서인지 강이나 호수에 있는 작은 섬들을 산이라 표현한다"고 말했다. <자문위원=권무일(소설가)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글·사진=진선희기자>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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