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사람들의 중원 경모 조선조 송대 주자학 필수로 '동몽선습'에도 중화 예찬 18세기 오랑캐 청나라 번영기 국가차원 조선중화주의 허상 사대주의 벗고 대한제국 등장 예전의 중국은 지금과 비교할 때 그리 넓은 지역이 아니었다. 사마천은 '사기·오기열전吳起列傳'에서 하夏와 은상殷商의 강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는 "황하와 제수濟水(하남성)가 왼쪽, 태산과 화산(섬서성)이 오른쪽에 있으며, 이궐伊闕(하남성)이 남쪽, 양장산羊腸山(산서성)이 북쪽에 있다." 은상은 "맹문산孟門山(하남성)이 왼쪽에 있고 태항산太行山(산서와 하북의 경계)이 오른쪽에 있으며, 상산常山(하북성)은 북쪽, 대하大河가 남쪽을 경유했다." 서한 강역도. 동쪽과 남쪽 바닷가까지, 즉 지금의 광동, 광서성과 산동, 절강, 복건성까지 강역이 확장된 것은 진한秦漢 시절이다. 하지만 북쪽은 기존 주나라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는 진 시황제가 여섯 제후국을 멸망시켜 통일제국을 만든 후 제齊, 한韓, 조趙, 연燕 등이 만든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축조한 것과 관련이 있다. 만리장성 밖은 흉노와 선비鮮卑 북방민족이 자리한 곳이기 때문이다. 서쪽은 한 무제가 비단길을 개척하고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두면서 지금의 서장西藏까지 확대되었으나 서남쪽은 토번吐蕃이 자리하고 북방은 여전히 흉노와 선비가 자리했다. 또 한 번의 통일제국 당의 영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북쪽으로 치올라가 영토가 확장되었으나 서남쪽과 서북족은 토번과 돌궐에 막혀 허리가 심하게 좁아진 기형적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당 강역도. 남송 강역도. 청 세종 애신각라(愛新覺羅) 윤진. 청 강역도. 독립성이 엿보이는 대목도 있으나 중국을 경모하고 북방민족을 경시하는 것은 다를 바 없다. 고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소중화'라 칭하기 시작한다. 저고리 여밈. 오랑캐의 좌임인가, 중화의 우임인가. 청나라는 우임이었다. 본격적인 '소중화' 타령은 역시 조선조이다. 송대 주자학이 조선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어 모든 학인의 교과목이자 사대부들의 필수 학문이 되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어린 학생들이 배우는 '동몽선습童蒙先習'에 "이 때문에 중화인들이 우리를 소중화라고 일컬으니, 이 어찌 기자箕子가 끼쳐준 교화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 너희 소자小子(젊은아해)들은 마땅히 보고 느껴서 흥기興起해야 한다." 이 정도면 '소중화'가 어느 정도로 심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임진왜란에 명나라가 원군을 파견하여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명나라 만력제萬曆帝(신종神宗)의 '재조지은再造之恩'에 감읍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조 소중화가 얼마나 심했는지 보여주는 '동몽선습'. 국가적인 차원에서 적극 시행된 조선중화주의는 얼마가지 않아 허상임이 드러난다. 그것은 18세기 청나라가 지금까지 이루지 못한 번영기를 구가하면서 역대 어느 왕조보다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역대로 왕조의 전성기는 대부분 한 두 명의 황제에서 끝이 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청조는 최소 3명, 강희, 옹정, 건륭제까지 최소 3명의 황제가 136년(1661-1796년)동안 최전성기를 유지했다. 당시 옹정제는 만주, 몽골, 한족의 제국을 표방하면서 한족의 문덕과 만주족의 무공을 함께 실현하는 것이 곧 진정한 중화라고 주장했다. 조선은 흥미로운 길로 떠났다. 하지만 자신을 중화로 자처하는 조선중화주의는 '소중화'와 마찬가지로 왕권을 수호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일 뿐이었다. 그나마 현실을 똑 바로 보고자 했던 북학파도 힘을 잃고 결국 새로운 중화주의를 자처하며 청을 멸시하는 태도만 살아남았다. 이후 그래도 대국이라 여겼던 청이 서양 외세에 형편없이 당하는 것을 보고난 후 청에 대한 멸시는 더욱 확고해졌고, 비로소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독립된 나라를 꿈꾸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대한제국의 등장이다.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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