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작/고재만 그림 15-3. 화려한 불꽃 뒤, 어둠 생전 마주한 적 없는 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렇게 마음속에 그리던 초상화 속 인자한 얼굴이 분명했다. 용찬은 나직이 중얼거렸으나 불러본 적 없는 아버지란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온화한 미소를 보이더니 차츰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잠에서 깨어서도 아버지의 우는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개운하지 못했다. 장석규의 부음을 접한 용찬의 마음은 착잡했다. 자신의 발설로 인해 죽었다는 죄책감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한편으론 그의 죽음은 그에게 고통받거나 한이 맺힌 사람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 줄 것이라는 점에서 위안을 얻었다. 용찬이 도청 브리핑 룸에 들어서는데 기자들이 보도 자료를 보며 웅성대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자료를 들었는데 첫눈에 '삼미동 차이나타운 사업 제동'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삼미동 차이나타운 조성 사업은 사업 목적에 위배 되므로 원인행위 무효라는 대법원 판결이 났다. 일부 토지주들이 제기한 토지반환 소송이 승소를 거둔 것이다. 주민들에게 헐값에 사들여 비싼 값으로 중국에 판매한 것은 토지를 수용할 때 휴양형 타운을 조성해서 주민들의 복지향상에 기여한다는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며, 이 또한 순수한 휴양형 콘도 분양이 아니라 대규모 카지노 시설을 유치해서 돈벌이를 위한 사업으로 변질되었으므로 이는 주민의 복지향상에 반하는 것으로 원인행위 및 사업시행계획 인가도 무효라는 최종 판결이었다. 삽화=고재만 화백 용찬은 순간 울분을 토하던 삼미동에서 만난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거리에서 시위를 하던 문대호도 이 소식을 들었을까? 그러면서 불안한 기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이 소식을 제일 먼저 알았을 테고 그랬으면 전화라도 왔을 텐데, 혹시 영원히 듣지 못하는 상황이 된 건 아닐까?' 바지 주머니에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문대호를 생각했는데 장종필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종필이 울음을 터트렸다. "으흐흐흐흐." "형, 무슨 일이야? 울지 말고 말을 해야 알지?" "요 용찬아, 우리 아부지가..." "부친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요?" 종필은 징징 울면서 기어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 "죽었어. 어젯밤에. 칼을 맞고..."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종필은 오열했다. 용찬은 장석규를 가만 놔두지 않겠다던 금산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어디예요?" 장석규의 부음을 접한 용찬의 마음은 착잡했다. 자신의 발설로 인해 죽었다는 죄책감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한편으론 그의 죽음은 그에게 고통 받거나 한이 맺힌 사람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 줄 것이라는 점에서 위안을 얻었다. 방화를 하고 대문 앞에 섰을 때 가로등에 비친 얼굴, 동행해서 중국 갔을 때의 모습, 자신을 빨갱이 자식이라고 박대했던 일 등 고인과 마주했던 여러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해연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그에 대한 증오의 그림자는 사라지는 듯했다. 장례식장에 갔을 땐 친족들이 모여 분향실을 꾸미고 있었다. 실신한 듯 벽에 기대어 있는 모친을 위로하던 종필이 용찬을 발견하고 곧바로 나왔다. 그는 밤새 술을 마신 듯 붉은 얼굴에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종필은 조문객들을 모시는 식탁으로 가서 앉더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길게 빨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목격자 말로는 술에 취해 밤늦게 귀가하는데 몇 놈이 시비를 걸더니 칼을 꺼내 난자했다는 거야." "범인은?" "현장을 지나가던 시민들이 붙잡았어. 쌍놈의 새끼들 불법체류 중국인들이야." 종필은 숨겨 뒀던 분노를 드러내듯 깊게 담배를 빨아들이더니 코로 두 줄기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부친에게 무슨 원한 있어요?" 종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담배꽁초를 바닥으로 떨구고는 발로 짓이겼다. "그 새끼들 우리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놈들이야." "임금 체불이라도 했어요?" "체불이라니? 계약대로 제때 다 줬는데 인력회사 놈들이 떼어먹은 거지. 헌데 아무래도 이상해. 그놈들이 사장인 날 놔두고 왜 아버질 해코지했을까? 이거 분명 배후에 뭔가 있는 거야." 용찬은 사건의 단초가 두목회를 폭로한데 대한 보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금산과의 통화 사실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흥분한 종필이 억측만으로도 분명히 사고를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출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한 젊은 여인이 울면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종필이 일어서며 그를 마중했다. "해연아" 해연이란 이름에 용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을 스쳐 지나가는 그녀는 몰라볼 정도로 많이 변했지만 그녀의 출현은 여전히 용찬의 숨을 멎게 하고 감각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편안한 모습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억지로 웃음까지 지었다. 그러나 용찬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자책감과 연민, 초상집 분위기와 애틋한 감정까지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사무실에 와서도 마음이 혼란스러워 용찬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용찬을 깨우기라도 하듯 휴대폰 벨이 울렸다. 대호의 사무실 김 간사였다. 그녀의 들뜬 목소리는 다급했다. "권 기자님. 방금 텔레비전에서 문 처장님 봤어요?" "예? 어디서요?" "뉴스에 홍대 앞 소식에 관한 게 나왔는데 지나가는 행인들 속에 분명 처장님이 있었어요." "분명 문대호 맞아요?" "처장님이 즐겨 쓰고 다니는 뉴욕 양키스 빨간 모자, 그 모자 때문에 유심히 살폈어요. 분명해요." "혼자였어요?" "아뇨, 옆에 여자와 팔짱을 끼고 있었어요. 그런데요 카메라 앞에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만들어 보이더라구요." 용찬의 머릿속이 다시 혼란스러워 졌다. 공항과 부두에 출입기록이 없는데 어떻게 섬을 빠져나갔을까? "경찰에 신고했어요?" "아뇨, 지금 하려구요." "이따 들를게요." 전화를 끊으면서 용찬은 중얼거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용찬의 머릿속이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대한 폭행을 생각하면 대호가 살아있는 것만도 다행이다. 그런데 어떻게 서울 거리를 활보하고 있지? 분명 금산과 무슨 거래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 내용이 뭘까? 도피해 다니는 사람이 카메라에 '나 잡아봐라'하고 액션까지 취할 만큼 대호는 간이 크지 못하다. 오히려 모든 일에 계획적이고 치밀한 성격이라는 것을 용찬은 알고 있다. 그런데도 방송 카메라를 피하지 않고 포즈까지 취한 의도는 또 뭐지?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시키는 것? 차이나타운 반대 운동이 성공했다는 것에 대한 성취감? 그러다가 용찬은 '아!' 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무릎을 쳤다. '그래, 이건 암시야. 어떻게 제주를 빠져 나왔는지 루트를 찾아보라는 과제를 준 거로구나.' 용찬은 그것이 의리를 배신한 미안함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이튿날, 박윤홍 지사는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도민들에게 사과하고 하나도 프로젝트를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두목회와의 유착은 사실무근이며 도정을 농단한 사람들을 엄정하게 조사해 처벌해 달라고 검찰에 고발했다고 말했다. 지사가 브리핑 룸을 나가자 옆자리에 앉은 중앙 일간지 정 기자가 물었다. "권 형, 전 지사 어디 있는지 알아?" "집에서 검찰 호출만 기다리고 있겠지." "아냐, 여러 방법으로 확인했는데 집에는 없어." "그럼 벌써 밖으로 튀었나?" "공항과 부두에 알아봤더니 이미 출국 금지된 상황이야. 하 이거 데스크에서는 확인 인터뷰 따라는데 입장문 하나 던져 놓은 이후로 전화도 불통이고 그를 본 사람이 없대요." 용찬은 다시 문대호를 생각했다. 그가 기록을 남기지 않고도 섬을 빠져나가 서울에서 활보하고 있다면 전형진도 이미 제주에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용찬은 틈이 나면 장례식장에 들렀다. 종필을 위로한다는 명분이었지만 해연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게 큰 낙이었다. 분향실 입구에서 해연과 마주쳤을 때 그녀는 편안한 모습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억지로 웃음까지 지었다. 그러나 용찬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자책감과 연민, 애틋한 감정이 초상집 분위기에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용찬은 오래 참았던 술을 기어코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제주에서는 보통 삼일장을 치르는데 첫날은 친척들이 모여들어 장례 절차 논의와 문상객 맞을 준비하고, 둘째 날은 일포(日哺)라 해서 영결식을 치르기 전날 조문객들이 찾아온다. 입구에서부터 분향실까지 양쪽엔 고인이나 상주와 관련 있는 단체나 거래업체에서 보낸 조화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일포 날은 아침부터 단체조문객들이 몰려들었고 밤늦은 시간까지 북적거렸다. 용찬은 혹시나 하고 살폈지만 두목회와 연관된 사람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화투를 치며 밤샘을 하는 사람들을 남겨놓고 친족들도 다음날 이른 출상에 대비한다며 모두 분향실을 떠났다. 종필은 하루 종일 조문객들과 마신 술 때문에 일찍 상줏방에서 잠이 들었다. 용찬이 눈치를 살피며 막 분향실을 나서는데 뒤에서 낯익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좀 봐요."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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