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작/고재만 그림 16-2. 욕망의 종말 바다 위를 헤엄치는 사람에게 조명등이 비춰졌다. 모자가 벗겨진 채 열심히 헤엄쳐 나가던 사람이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자 정체가 드러났다. 지명수배가 내려진 전형진이었다. 용찬을 태운 택시는 해경 경비정이 있는 부두로 달렸다. 상황이 예사롭지 않음을 판단한 해경은 용찬을 경비정에 태우고 유람선의 뒤를 쫓았다. 유람선은 고깃배들이 어로작업을 하는 해역을 벗어나 제주해협에 들어서고 있었다. 제주해협은 원래 물살이 센 지역인데 물때를 맞춰 택일한 것인지 바다는 잔잔했다. 해경 경비정이 다가서는 것을 눈치 챈 유람선이 속력을 높였다. 그러나 물길에 익숙한 경비정은 더 빨랐고 사이렌을 울리며 곧 따라 붙었다. "대룡유람선 정선하시기 바랍니다. 대룡유람선 운행코스 이탈했습니다. 정선 하세요." 경고를 무시하고 유람선은 오히려 최고의 속력으로 달아났다. 한동안 해상에서 추격전이 벌어졌다. 앞서 달리던 유람선에서 별안간 검은 물체를 바다에 내던졌다. 용찬은 그것이 해경의 시선을 빼앗고 추격을 지체시키기 위한 수법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경비정은 물체가 투척된 지점에 원을 그리며 선회하더니 곧바로 잠수복을 입은 해경 두 명이 바다에 뛰어들었다. 입수한 해경들은 그리 오래지 않아 유람선에서 투척한 물체를 찾아내어 경비정에 올렸다. 물체는 검은 비닐로 단단히 묶여 있는 상자 같았다. 다시 유람선을 뒤쫓는 사이 연락을 받고 달려온 커다란 순시함 한 척이 유람선을 가로지르며 나타났다. 순시함은 조명탄을 쏘아 바다를 환하게 밝히면서 사이렌을 울린 후 경고 메시지를 날렸다. "정선 하세요. 정선 하지 않으면 발포합니다. 정선 하세요." 갑자기 커다란 함정이 나타나 앞을 막자 유람선은 놀랐는지 급하게 항로를 바꿔 회전 하려 했으나 순시함이 이미 코앞에 닥친 터라 회전의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유람선은 순시함의 옆구리를 치고 나서야 멈춰 섰다. 그때 유람선 안에 있던 몇 사람이 허둥대며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경비정을 밀착시키고 무장한 경찰들이 유람선으로 옮겨 탔으나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경찰들은 유람선의 조명등을 모두 켜고 선내 곳곳을 뒤지며 수색을 시작했다. 경비정과 교신을 끝낸 순시함은 뱃고동을 울리더니 유유히 바다를 가로 질러 사라졌다. 파도에 잔잔히 흔들리는 경비정에 있던 지휘부 사람들은 긴장하며 유람선을 지켜봤다. 용찬도 입에 고인 침을 목으로 넘기며 상황의 추이를 살폈다. 잠시 후, 유람선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손을 머리에 올리고 줄줄이 밖으로 끌려 나왔다. 불빛에 나타난 그들의 모습은 노동자 복장이었다. 그들은 경비정으로 옮겨 탔고 경찰의 지시에 따라 질서 있게 갑판 바닥에 앉았다. 통역관이 그중 한 명에게 중국어로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통역관이 경비정장에게 보고했다. "중국인들인데 선장까지 남녀 모두 16명입니다." "하. 드디어 꽁무니를 잡았네. 어떻게 육지로 도주하나 했더니." 무비자로 제주에 들어와서 돌아가지 않은 장기불법체류자가 2만 명이나 되는데, 탈출 경로 중 하나가 드러난 셈이다. "자 고개를 들어요." 카메라를 든 경찰이 자리를 옮겨가며 그들을 촬영했다. 용찬은 혹시나 하여 일행을 찬찬히 살펴보았으나 아는 얼굴은 없었다. 정장이 '시작 해' 라고 명령하자 조사관이 일행들을 주목시켰다. "여기 선장 누굽니까?" 맨 뒤에 앉은 옷차림이 비교적 깨끗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선장, 어디로 가는 중이었나요?" "......" 선장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말 안 해요? 몇 번 쨉니까?" "......" "좋아. 언제까지 버티나 봅시다. 여기 인솔책임자는 누굽니까?" 조사관이 말하는 내용을 통역관이 일행들에게 중국어로 설명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일행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둘째 줄에서 눈치를 보던 인솔자가 손을 들었다. 그는 한국어에 능숙한 조선족이었다. "저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것뿐입니다." "누가 시켰습니까?" "일을 기획한 사람은 따로 있어요. 전 그냥 서울까지 데려다주는 것뿐이에요." 조사관이 맨 앞쪽에 앉은 사람에게 물었다. "진짭니까?" "예. 계약한 사람 따로 있어요." "얼마 주고 이 배 탔나요?" "선금 2백 물었구요. 육지 도착하면 3백 주기로 했어요." 조사관이 다시 인솔책임자에게 물었다. "그럼 애초에 당신을 고용한 사람은 누굽니까?" 이러는 사이에 유람선에서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모자를 눌러 쓴 사내가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갑자기 바다로 뛰어들었다. 정장이 달려가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야?" "한 놈이 화장실에 숨어서 절대 문을 열지 않지 말입니다. 그래서 공구로 문짝을 떼내고 보니 저 사람이." "그럼 선장 빼고 중국인이 16명이야?" "불법체류자 아니지 말입니다." "뭐라고? 어서 끌어 올려" 바다 위를 헤엄치는 사람에게 서치라이트가 비춰졌다. 모자가 벗겨진 채 열심히 헤엄쳐 나가던 사람이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자 정체가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는 지명수배가 내려진 전형진이었다. 왕금산에게는 살인 및 살인교사, 외국환거래법 위반, 출입국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지명수배가 내려졌다. 하지만 왕금산은 나타나지 않았고 거처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유람선이 완전히 접수되자 끌어 올린 물체의 정체에 관심이 집중됐다. :저건 뭐야? 해채해 봐." 정장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던 경찰이 커터칼을 꺼내들고 물체에 다가섰다. 김장용 비닐을 이용하여 여러 겹으로 묶어진 포장을 풀어헤치기 시작하자 역한 냄새가 났다. 커다란 여행용 캐리어가 나왔는데 가방을 열자 농산물 마대에 담긴 물체가 나왔다. 가방 속에는 물속 깊이 가라앉히기 위해 큼지막한 돌멩이가 들어 있었다. 냄새나 마대에 스며 거무튀튀하게 변색된 핏물의 흔적으로 보아 시신이 분명했다. "시신 같은 데요?" "확인해 봐." 삽화=고재만 화백 마대를 예리한 칼날로 조심스럽게 절개해 나가자 지독한 악취가 났다.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코를 막았다. 시신은 부패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피로 범벅이 된 여자 옷을 입고 있었다. 코를 막고 상황을 목도하던 용찬은 시신을 보자마자 경악 했다. 마지막으로 본 그날 정소영의 옷차림이 분명했다. "이런 개 같은 자식." 용찬이 분노를 드러내자 정장이 물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용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소영입니다. 베이징이라는 룸살롱에 근무하던 여잡니다." 용찬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날 성난 짐승처럼 난동을 부렸던 금산의 얼굴이 떠올랐다. 용찬은 기어코 눈물을 쏟아냈다. "이 나쁜 새끼." 용찬은 사건이 있던 이틀 후 아침 일찍 검찰에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다. 룸 베이징에서 금산에게 폭행당한 날 업자에게 접대 받은 것은 김영란법 위반이라는 걸 알았고, 불법촬영 공모 등의 혐의로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강도 높은 조사를 받은 후에야 풀려났다. 전형진은 하선 하자마자 기다리던 검찰에 인계되었다. 그러나 전형진은 자신은 제주도를 위해 헌신했을 뿐이고, 모함이라며 끝까지 법정에서 투정할 것을 변호사를 통하여 기자들에게 밝혔다. 두목회 회원들은 소환 조사하는 과정에서 각자도생의 길을 선택했다. 전형진에게 불리한 증언들이 나오면서 전형진은 구속되었고 농단에 참여했던 회원들도 불구속 입건되었다. 전형진의 구속은 제주뿐 아니라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두목회 회원들의 전횡이 드러나자 서울의 기자들이 제주로 몰려들었다. 그들에게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익명으로 그들의 숨겨진 악행과 여죄들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룸 베이징 지배인과 직원들을 불러다가 조사한 결과 정소영에 대한 살인 및 시신 유기 교사자가 왕금산이란 것이 밝혀졌다. 룸 베이징은 마약 투약과 성매매, 탈세의 온상지임이 밝혀져 영업정지를 당하고 세무조사를 받았다. 수사는 대룡관광과 랴오닝 그룹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왕금산에게는 살인 및 살인교사, 외국환거래법 위반, 출입국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지명수배가 내려졌다. 하지만 왕금산의 거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주를 탈출하다 붙잡힌 불법체류자들의 인적사항을 조회한 결과 성폭행 사범, 폭력사건 혐의자, 사기사건 연루자, 주거침입 절도 등 수배자가 7명이나 되었다. '불법체류자 탈출 루트 드러나다'란 제목으로 권용찬이 쓴 대룡관광유람선 사건 기사는 또다시 특종이 되면서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다. 그것이 반가웠는지 한동안 냉랭했던 데스크에서 전화가 왔다. "권 기자. 특종 축하해. 위에서도 대단히 기뻐하고 있어. 그리고 말야, 이참에 지방토호들의 비리 실태를 사례별로 취재해서 시리즈로 가자고..." 용찬은 전화를 끊으면서 데스크의 신임을 되찾았다는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이 기사는 한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ihalla.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webmaster@ihall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