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작/고재만 그림 17-2. 출구 전략 "임마. 홍보대사 끝났고 랴오닝에서도 잘렸다구. 알겠냐? 이용만 당하고 팽 됐어. 허나 두고 봐. 왕금산은 죽지 않아. 반드시 일어선다." 그의 출현으로 장례식장 분위기는 마치 결혼식장처럼 활기가 넘쳤다. 왕금산의 차림새는 도피자의 모습은 아니었다. 여전히 당당하고 밝은 표정으로 친족들의 손을 마주 잡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가 태연하게 조문객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용찬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며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용찬이 사무실에 돌아와 기사를 작성하는데 종필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이 크게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장석규 씨 살인사건 재판과정에서 왕금산이 살인 청부했다는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종필은 흥분해서 대뜸 화부터 냈다. "그 새끼 온 거 알아?" 용찬은 둘 사이에 끼어들기 싫어 그를 보았다는 사실을 숨겼다. "예. 나도 소식 들었어. 형." "그 새끼 죽여 버릴 거야. 그 개자식이 우리 부친 죽이라고 교사한 거 너도 알지?" "응. 알아. 형. 허나 지금은 상중이니 상황이 안 좋아요. 장례 치른 후에 만나세요." "야 너 내 대가리 돌로 보이냐? 그 새끼 영결식 치르기도 전에 튀어 버릴지도 모르고, 식 끝나면 경찰이 잡아갈 거 아냐? 난 그놈 그대로 못 보내. 용찬아, 너 밤 11시에 용연 팔각정으로 와. 내가 그놈을 어떻게 아작 내는지 보여 줄게." 용찬이 말리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용찬은 금산이 괘씸했지만 일이 크게 벌어지기 전에 이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상객들이 다 물러가고 한가할 시간을 추산하여 밤늦게 다시 장례식장으로 갔다. 금산은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용찬을 목도하자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넉살 좋게 맞이했다. "금한령. 그거 좀 있으면 풀려, 한국도 관광객이 안 와서 손해지만 중국도 한국에서 원자재 수입하지 못하면 문 닫는 공장이 많거든. 그것보다도 말야, 평생 보리밥 먹던 사람이 쌀밥 맛을 알면 보리밥 먹겠어? 이미 중국 사람들은 한국산에 맛 들여졌어. 이미 유행병처럼 번진 한류를 나라에서 아무리 말리려고 해도 말릴 수가 없거든." 금산의 논리가 일견 타당하게 생각됐다. 개혁 개방을 표방하는 정부가 국민의 요구를 무한정 모른 척할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금산은 말했다. 금산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입안에 털어놓고 빈 잔을 내밀었다. "자 친구야 한잔해." 용찬은 내미는 술잔을 받고 싶었지만, 일주일 째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던 의지를 생각하고 꾹 참으며 변명을 했다. "아니야. 나 간 안 좋아 약 먹고 있어." "끊은 거야? 이런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 보며 맨 정신으로 살 수 있을 거 같아?" 금산은 다시 술잔을 채워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놓고는 요상한 웃음을 날렸다. "흐흐흐. 용찬아 고맙다. 네 덕에 철들었다. 이제야 세상이 뭔지 알게 됐으니. 흐흐흐." 용찬은 금산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가 의아스러웠다. "무슨 소리야?" "임마. 홍보대사 끝났고 랴오닝에서도 잘렸다구. 알겠냐? 이용만 당하고 팽 됐어. 허나 두고 봐. 왕금산은 죽지 않아. 반드시 일어선다." 금산은 굳건한 의지를 확신이라도 하듯, 빈 술잔을 탁자에 소리 나게 치며 내려놓았다. "내가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너희들은 모른다. 난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다. 원숭이가 아닌 인간으로서 내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지. 난 성공의 에스컬레이터를 탔지만 잃은 것도 너무 많다. 그중에 친구의 배신은 생살 도려내는 것보다 더 아팠다." 용찬은 금산을 열등감에 사로잡힌 욕망의 노예라고 생각했다. 경계인으로서의 자격지심을 방어할 수 있는 무기를 돈이라고 생각했고,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이룰수록 채울 수 없는 결핍을 낳는다는 걸 금산은 몰랐던 것일까?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반성하는 기색은 없고 남 탓하는 금산이 얄미웠다. "종필이 형은 널 증오하고 있어." 금산은 불콰한 얼굴로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날렸다. "그 새끼. 아직도 철 덜 들었구만. 너도 알다시피 내 피를 거꾸로 솟구치게 만든 게 누군데? 내가 전화했어. 흐흐흐. 용연에서 한 판 붙자고 했지. 그 새끼 얼마나 싸움 실력 늘었는지 한번 보자 그래." 종필은 금세 물 위로 떠올라 구급차에 실려 갔다. 그러나 날이 밝자 경비정이 동원되고 잠수부들이 민물 위쪽과 부근 바다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금산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다. 금산은 식당 한쪽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형사를 따돌리고 상복을 벗어둔 채 약속한 장소로 갔다. 용찬은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파국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따라나섰다. 용연(龍淵)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사또나 양반들이 뱃놀이를 즐기던 곳이다. 옛날 선비들은 뱃놀이를 즐기며 병풍을 두른 듯한 양쪽 절벽에 절경을 노래한 마애명(磨崖銘)을 남겼다. 이 뱃놀이를 병담범주(屛潭泛舟) 또는 용연야범(龍淵夜帆)이라 했는데 용연은 한라산에서 내린 물이 바닷물을 만나 서로 얼싸안는 곳이다. 시내에서 조금 외진 곳이고 늦은 밤이라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려 팔각정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은 둔덕이어서 용찬은 금산을 따라가면서도 숨이 찼다. 금산도 숨이 찼는지 언덕 위에 서서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뒤돌아 바다 쪽을 보고 있었다. 용찬도 다가가서 크게 숨을 뱉어내었다. 바다에는 집어등을 켠 배들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서 조업하고 있었다. 달은 눈썹만큼 남아 사방은 어두웠다. "언제 정자가 생겼지? 저기는 우리 삼총사 시절 다이빙 하며 놀던 곳이잖아? 생각 나?" "생각 나지. 누가 제일 멋지게 입수하나 내기 했잖아?" "내가 제일 멋있었지? 수영 실력도 내가 제일 이었고." "힘 좋았던 것은 내가 인정." 용찬의 말이 흡족한 듯 금산의 입꼬리가 찢어졌다. 그러나 그런 여유 있는 태도도 잠시였다. 졸고 있는 듯한 희미한 정자의 불빛에 종필의 모습이 드러나자 금산은 어금니를 악물며 적개심을 드러냈다. "무기 사용하지 않고 몸으로만 싸운다. 한쪽이 항복하면 싸움 멈추고 화해한다. 알았지?" 용찬은 규칙을 정하고 두 사람에게 다짐을 받으려 했다. 금산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종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금산을 노려볼 뿐 두 손을 불끈 쥐고 싸움 태세에 들어갔다. "어서. 덤벼." 삽화=고재만 화백 싸움 초반은 술에 취한 금산이 많이 맞았지만, 코에서 흘린 피를 옷소매로 닦아낸 금산이 금세 종필을 제압했다. "이 개만도 못한 놈.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은 인간도 아니야. 이 중국놈의 새끼야." 종필의 말이 끝나자 금산이 달려들며 응수했다. "의리를 배신하는 새끼도 인간이냐?" 둘이 엉겨 붙으며 엎치락뒤치락하더니 종국에 금산이 종필의 목을 조르며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종필은 허우적대면서 버티더니 어느 순간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금산의 허벅지를 찔렀다. "헉헉, 항복 좋아 하네 개새끼" "안 돼. 그만 둬." 용찬이 말리려고 다가섰으나 사태는 일순간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금산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튕겨져 나왔다. 종필은 가쁜 숨을 몰아서며 상체를 일으켰다. 금산이 상처를 부여잡고 일어서며 용찬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심판...이거... 반칙이잖아?" "칼을 버려. 형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반칙, 애초에 반칙한 게 누군데. 내 아버지를 죽인 게 누구냐고?" 종필은 벌떡 일어서며 피투성이 일그러진 얼굴로 금산을 노려보았다. 용찬은 다리가 후들거려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종필은 악에 바쳐 이를 악물며 금산에게 달려들었다. 다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금산이 칼을 빼앗아 종필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 개x같은 새끼야 죽어라." "악." 금산이 휘청거리며 비켜서자, 난간에 기대어 비명을 지르는 종필의 옆구리에서도 선혈이 흘러나왔다. "안 돼." 용찬은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소리만 지르다가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가까스로 119를 눌렀다. 종필은 옆구리를 부여잡고 휘청이면서 꽂힌 칼을 빼내 들었다. "그만들 하라고." 용찬이 외쳤지만 다리 난간에 기댄 금산을 찌르려고 종필이 재빠르게 달려들었다. 금산이 잽싸게 몸을 피하며 종필을 ㅤㅂㅡㅌ잡는 순간 둘은 난간 아래 절벽으로 떨어졌다. 잠시 후 둔탁한 물체가 수면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용찬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광경에 다리가 풀렸다. 흔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절벽 아래를 살폈으나 어둠이 그들을 삼켜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용찬은 망연자실한 상태로 울부짖으며 계단을 따라 절벽 아래로 달려갔다. 멀리서 구급차가 경보음을 울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종필은 금세 물 위로 떠올라 구급차에 실려 갔다. 그러나 날이 밝아 경비정이 동원되고 잠수부들이 민물 위쪽과 부근 바다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금산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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