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순력도' 중 '교래대렵'. '탐라록'에는 이형상 제주목사가 교래리 사냥 장면을 흥미롭게 바라본 글들이 나온다. 민속자연사박물관 총서 15개월 걸친 사적인 기록 명승 탐방 한편 가련한 삶 출세가도로 접어들던 그는 경상감사가 올린 파면 요구 서목 이후 영천에 호연정을 짓고 은거생활을 한다. 1701년(숙종 27) 11월 제주목사에 임명되며 재기에 나서지만 주변 반응은 차가웠다. 그와 교유하던 영남 명사들은 완곡히 만류했고 노론계열 인사들은 '벼슬이라면 절대 거부하지 않을 사람'이라며 비아냥댔다. 병와 이형상(甁窩 李衡祥, 1653~1733) 제주목사다. 오늘날 문화재가 된 '탐라순력도'와 '남환박물'을 통해 18세기 제주를 기록했던 인물이다. 스스로도 '나랏밥 먹는 귀양살이'라고 자조했던 이형상 목사의 제주살이는 어땠을까. 1702년 3월 제주로 들어오는 길부터 1703년 6월 영천으로 돌아가기까지 15개월 정도의 사적인 여정을 담아낸 '탐라록(耽羅錄)'에서 그 일단을 읽을 수 있다. '섬이 명구(名區)인지라 땅은 더욱 그윽한데/ 문재(文才)는 모자라도 무재(武才)는 빼어나네/ 휘파람으로 소를 몰아 밭을 모두 밟아줘야 하고/ 절구질에도 노래가 있는데, 모두가 사투리라네/ 여인네들 등짐지고 물질하는데 남자는 도리어 한가하고/ 백성들 곤궁한데도 또한 사치하니, 풍속 부박한 것 같네/ 사시사철 가죽옷 입으며 풍속과 인정 야박한데/ 누가 웃통 벗고 잠방이 입은 이들의 수심 알아주랴'('제주 지방 풍속(土風)') 고르지 못한 날씨가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제주는 그에게 이채로운 풍경과 궁핍한 현실이 교차하는 섬이었다. 병와는 섬 곳곳 명승을 노래하고 교래리 말 사냥을 구경하는 등 이방의 풍속을 즐기지만 '밀감 따서 바칠 걱정'인 가련한 제주 사람들의 일상도 드러낸다. 이진영 제주학연구센터 교열위원이 역주했고 김익수 국사편찬위원회 제주시 사료조사위원이 감수를 맡았다. 비매품. 박물관 홈페이지에 PDF 파일이 공개되어 있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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