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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그린다… 부끄러움 없는 작업 위해”
한라일보 갤러리 이디
백광익 작가와의 대화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입력 : 2020. 08.31. 00:00:00

백광익 작가가 지난 27일 한라일보 갤러리 이디에서 '밥 먹고 그림 그리는' 일상 등 근황을 포함 지난 화업을 담담히 풀어내며 관람객들과 만나고 있다. 이상국기자

비구상 작품 한때 수난
제주 소재·사유의 확장
근래 세한도 모티브 작업

교직에서 정년퇴임한 지 6년째. 그는 오후 8시 잠자리에 들고 오전 4시 무렵이면 눈을 뜬다. 동틀 때까지 새벽 작업을 마친 뒤 오전 6시30분쯤엔 예초기를 들고 운동장 풀베기에 나선다. 간단히 아침밥을 해결하고 나면 다시 또 그림을 그린다.

도심을 떠나 서귀포시 대정읍 옛 무릉중학교에 둥지를 튼 백광익 작가가 잠시 작업실을 벗어나 관람객들과 만났다. 한라일보 1층 갤러리 이디(ED)에서 펼치는 초대전 일정으로 지난 27일 오후 3시부터 마련된 작가와의 대화에 참여했다.

백광익 작가는 지난 1일 개막해 9월 25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초대전에 2020년 신작을 위주로 '오름 위에서' 연작 등을 선보이고 있다. 그가 '무릉도원'으로 부르는 마을에서 작업에 전념하고 있는 작가는 이날 짧은 시간이었지만 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개인전만 35회를 치러온 40여 년 화업 여정을 풀어냈다.

'제주 추상미술 1세대 작가'란 수식어가 붙는 그의 기억은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제주대 미술교육과 졸업을 앞두고 준비한 그림이 "작품이 아니다"란 말을 들었고 창작미술협회 공모전에서 부적을 소재로 그린 비구상 회화 '78-세월'이 대상에 뽑히면서 비로소 인정을 받았다는 일화였다. 그는 "서울에서는 앙데팡당 등 현대미술 조류를 공부하던 시절에 제주에선 과거를 답습하며 산천초목만 그리게 했다"고 그 시절을 떠올렸다. 그래도 당시 강사로 있던 강광 작가는 미술학도들에게 "마음의 심상을 표현하는 것도 그림"이라며 힘을 실어줬다.

작가는 1995년 국내에서 처음 '비엔날레'로 추진했던 제주프레비엔날레 이야기도 꺼냈다. 그는 프레비엔날레가 남긴 상처를 딛고 제주국제예술센터 등을 통해 제주라는 섬을 미술로 알리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제가 아는 건 78년 이후 제주미술 밖에 없다"는 작가는 이 땅에 발딛고 살아오며 화산섬 제주의 유다른 문화와 자연을 작업에 담아왔다. 귀양풀이, 기메, 오름 등 작업의 주제가 변화해왔고 어느 시점부터는 그것들이 한데 어울려있는 화면을 빚어내고 있다. 오름은 갈수록 야트막해지고 있는 반면 하늘과 우주까지 품으며 사유의 폭이 확장되어왔다.

대정에 유배됐던 추사의 '세한도'를 모티브로 창작한 백광익의 '오름 위에 부는 바람'.

근래 작가는 9년 가까이 대정에 머물렀던 유배인 추사 김정희가 남긴 '세한도'에 빠져있다. 실제 초대전에 나온 '오름 위에 부는 바람'의 장면들은 '세한도'를 연상시킨다. 추사가 '세한도'를 그린 의미를 곱씹게 된다는 작가는 '날이 차가워져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그 안의 글귀가 마음에 와닿는다고 했다.

그의 작업은 구도의 과정을 닮았다. 바탕에 물감을 입힌 뒤 날카로운 조각칼을 이용해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 나오는 그것처럼 별 하나, 별 둘을 일일이 새겨넣는다. 한 해 4차례 초대전이 있을 땐 약 200점을 그같은 방식으로 제작해야 했다. 제주에서 오래된 4B화방에서 일 년 중 가장 많은 캔버스를 구입하는 작가로 통하는 그는 "늘 작업하고 있어서 어디 내놔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덧붙였다.

간담회가 마무리될 즈음 후배 작가들이 그를 찾았다. 모처럼 '시골'에서 제주시내로 나왔으니 저녁밥을 같이 하자며 백 작가가 부른 거였다. 작가는 "잘 그리려 하지말고 좋은 그림을 그리라"고 했던 어느 선배의 말을 후배들에게도 똑같이 들려준다. 그 말이 힘을 얻으려면 선배가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했다. 그가 오늘도, 내일도 그림 그리는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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