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력시설 등 점유로 새로운 경관 경관의 디스토피아 돼 가는 제주 누가 ‘보물섬 제주도’라고 말하나 #사라지는 우리의 고향 우리의 고향이 사라지고 있다. 정확히 말해 촌이라고 불렀던 농촌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고향이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가 알던 내 동네의 풍경이 새롭게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알던 장소가 폐허가 되고 다시금 그곳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볼 때마다 마치 승리를 구가하는 기념물을 보는 것 같은데, 모든 건물들이 미래를 쳐다보며 부숴지고 의욕적으로 다시 세워지는 것을 볼 때, 언제나 문명의 시작과 끝을 연상 할 수가 있다. 아무렴 설립자 입장에서 발전, 희망, 진보, 약속의 구호들을 앞세우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우리가 오늘 보는 폐허도 시작할 때는 단연코 하나의 새로운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새 것들을 볼 때마다 다시 폐허가 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그 당연함 너머로 낡아가고 빛 바래는 것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를 깊은 허탈감에 빠져든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에 퇴색하지 않는 것이 없고, 사물의 한계 또한 그 연한이 있는 것이 그저 평범한 세상의 이치지만, 어쩌면 우리 일상은 평범한 그런 것들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리가 그런 단순한 것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렸던 것은 아닐까. 2007년 제주 풍경. 어쩌면 현대인에게 고향이라는 개념이 낭만적이거나 아예 없을 지도 모른다. 인류의 경제적 형태의 진행 단계가 수렵→유목→농경→상공업의 길을 걸으면서 오늘날의 도시가 주축인 사회를 이루었는데, 그 도시의 삶이 세계 간 사람들이 서로 이주와 이동이 자유롭게 되면서 '도시 유목민'이라는 신개념을 낳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이 기술 혁명이 도래한 지금에 마치 유목민들이 초원을 찾아다니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유사하다는 데서 '도시유목민'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유목민이 고향이 없는 무장소 초원인 것처럼 도시의 삶에서는 고향이라는 장소 개념이 그리 중요치 않게 된다. 현대인에게는 어디에서든 렌트를 하면서라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사실 고향은 인류가 정주민(定住民)이 되면서 확보한 토지, 가옥, 공동체의 소유 이념에서 생겨난 것이다. 지금 가진 문중(門中)의 제위전(祭位田), 가정의 농경지, 가옥, 바당밭이나 마을 공동목장, 공동 묘지임야 등 공·사유지가 매매돼 버리면 더 이상 원초적인 고향은 없게 되고 정든 곳이 고향이 된다. #국토의 일부였던 촌의 상실 고향이 사라지면서 점점 풍경이 바뀐다. 소유한 토지가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새로운 사업용 건물, 아파트, 각종 새 시설물들이 농촌과 도시를 연결하고 땅거미같이 점점 도시로부터 잠식이 일어난다. 원래 촌(村, 시골)은 국가를 의미한 동시에, 국토(land)의 일부를 의미하기도 했다. 제주시와 분리된 촌은 사회 전체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사회의 일부인 전원(田園) 지역일 수도 있다. 사회적 관념으로 보면, 촌은 그야말로 촌스럽고(후진적이고), 무지몽매하며, 보수적이고 편협한 곳이다. 반대로 도시는 모든 것의 중심이 돼 기술, 학문, 소통, 소음은 있으나 기회와 야망의 장소로 생각된다(Raymond Williams, 2013). 현재의 돌담 경관. 풍력시설이 만들어내는 문화경관이 제주 풍경 깊숙이 들어왔다. 칼 사우어(Carl Ortwin Sauer, 1889~1975)의 문화경관(cultural landscape) 이론에 따르면, 자연환경은 시간이 바뀜에 따라 특정 문화를 지닌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고, 결국 그 자연경관은 그 환경을 점거한 사람들의 문화경관으로 바뀌는데 고정된 자연경관인 토양, 기후, 지하자원, 해안, 관계망, 식생 등이 특정 문화 그룹이나 자본 주체가 어떻게 경영하는가에 따라 원래의 자연경관이 달라지는 것을 문화경관이라고 한다. 제주도 곳곳의 풍력시설은 점점 각 지역을 연속적으로 점유(Sequent occupance)하면서 제주도 전체 경관이 풍력 발전 사업에 의해 점점 다른 문화경관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한 예이다. 타운하우스, 리조트, 위락 공원, 군사기지 등으로 전통 마을의 구분이 사라지고, 하루아침에 새로운 장소가 등장함으로써 우리의 기억과는 다른 인정머리 없는 낯선 풍경들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낯선 풍경? 사실 어떤 풍경도 어느 날 갑자기 낯선 풍경이 된 적은 없다. 쫓기는 일상에서 그것을 눈여겨보거나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다 보니, 큰 변화를 감지하고 눈에 거스르는 때에 이르러서야 그것이 비로소 보이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을 '풍경 기억상실(landscape amnesia)'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풍경 기억상실'이란 시민들이 자신이 사는 지역의 환경이 다르게 변한 줄 모르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가서 이미 새롭게 변해있다는 것을 뒤늦게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제주도의 상황은 10년 새 '풍경 기억상실'이 눈에 띄게 나타났고, 여전히 어느 지역, 어디선가 어떤 기획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노스탤지어는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 1970년대 제주도는 관광개발만이 곧 새로운 유토피아에 진입하려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제주도를 말로는 인문학의 가치가 높은 보물섬이라고 하면서, 진정 그 가치를 지키거나 계승하려는 문화정책은 없다. 섬의 자연을 망가뜨리는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인가. 빈 상자를 보고 나서야 그것이 진짜 보물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 있었던가. 하나의 이념은 무섭다. 도그마가 눈과 판단을 가리기 때문이다. 세상의 기준을 부자로 설정하다보니, 선(善)과 불선(不善)이 돈으로 구분되었다.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소환하려는 향수병들이 곳곳에 있다. 있던 것마저 지키지 못하면서 없던 것을 찾으려는 것을 크게 반성하라. 있던 것을 없게 만든 것은 그 역할을 진실 되게 수행치 못한 우리 자신을 알라. 유토피아로 시작해서 향수로 끝난 제주도. 한 여성학자는 향수를 "삶과 역사적 격변의 리듬이 가속화되는 시대의 방어기제"로 바라볼 것을 제안했다. 현실에 없던 유토피아가 다시 도래할 것을 꿈꾸게 만드는 상상이 향수의 위험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점점 경관의 '디스토피아'가 돼 가는 제주도. 경관을 말할 자격을 이미 잃어버린 사람들이 다시 경관을 말한다. 사람들은 힘든 현실과 깜깜한 미래 앞에서 다시 유토피아를 그리워 할 것이다. 유토피아를 상상하면 할수록 노자에 "모든 것을 탄생케 한 '중묘지문(衆妙之門), 혹은, 천지의 뿌리가 되는 '현빈지문(玄牝之門)'"으로 돌아가려는 향수에 젖는다. 아름다운 제주는 옛말이 됐고 돌아갈 유토피아도 없는데, 또 어디선가 제주도가 보물섬이라고 해적들이 노를 저어 온다. <김유정 미술평론가(전문가)>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이 기사는 한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ihalla.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webmaster@ihall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