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위대함 길라잡이 역할 성실성, 보물 같은 열매 상징 예술, 의미와 아름다움의 완성 전통사회에서는 선비와 장인이면 두 개념이 부딪치는 말이다. 선비하면 조선시대 성리학 이념 아래 그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다. 선비의 한자 뜻인 유생(儒生), 유사(儒士)의 우리말인 '선비'라는 말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세종 때 한글 창제 이후 문헌 '용비어천가'에서다. 거기에는 '선븨'라는 표기가 두 번 사용되는데 선비는 유생(儒生), 유사(儒士), 소유(小儒), 노유(老儒)라는 말이 있으며, 유학을 공부하여 관리가 되려는 사람이나 관리가 된 사람을 말한다. 선비는 양반의 기틀로서, 학생(學生)은 과거를 볼 수 있는 사람을 말하고, 유학(幼學)은 아직 벼슬하지 못한 선비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선비는 어떤 사람인가. '훈몽자회'에서는 '유(儒)'를 '선비 유'라 하여, 그 뜻을 "도덕을 지키고 학문에 힘쓰는 사람(守道攻學曰儒)"이라고 해설하고 있다(최봉영, 1997). 현병찬 서예가의 제주민요 효행가. 조선시대의 신분 질서에서는 선비와 장인을 융합시키기 매우 어렵다. 선비는 학문과 도덕이 중심이고, 장인은 수공업의 기술을 펼치는 사람이어서, 또 사회구조가 이것의 융합을 허락치 않았다. 그러나 현대는 이 두 가지 개념을 실행할 수 없어서 고민이지,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을 처지가 아니다. 이것이 전통적 가치관을 전복시킬 이유가 된다. 선비정신에서는 그 가치관을 받고, 장인정신에서는 그것의 수공예 전문성을 이어받음으로써 서예 예술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비로소 현대에 와서는 예술적 표현에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주장까지 등장함으로써 오히려 장인정신은 예술 정신의 적극적인 동인(動因)이 되고 있다. 라틴어 호모 파베르는 제작자(man as maker)를 뜻하는 말이다. 제작자는 물질적인 노동과 그 행위를 완성하는 생산자이다. 문명의 성장이 이들이 만드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졌고, 인간의 삶도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손은 의식을 깨워준다. 일은 놀이를 새롭게 조직한다. 예술은 의식과 노동의 합일적인 행위이니, 선비의 정신세계와 장인의 기술적 세계는 창작의 절대적 필요조건이 되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개인에게서 나온다. 예술가가 죽으면 예술도 함께 죽고 작품만 남는다. 그것이 예술의 희소한 가치이다. 현병찬 근영. 꼭 필요한 사람, 스승 이솝우화에 있는 말인데, 한 노인이 임종이 가까워지자 아들들을 불러놓고 유언을 하길, 자신의 포도밭에 보물을 숨겨놓았으니 그것을 잘 지키라고 했다. 노인이 영면하자 아들들은 그 보물을 찾으려고 포도밭을 모두 뒤졌으나 허탕을 쳤다. 포도밭의 수확철이 되자 포도가 주렁주렁 열려 아들들은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때서야 그들은 크게 깨달았다. 아버지와 함께 날마다 일을 하며 배운 재배 기술 때문에 포도밭을 풍성하게 했고, 진정한 보물이 바로 성실성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부끄러워했다. 한글 서예가 현병찬에게는 스승이 몇 분 있는데 소암, 해정, 김성탁 선생이 그분들이다. "나는 한글을 쓰고 있는데 나에게 지도해주는 분들은 모두 한문 선생님들이었다. 소암 선생님도 한문 선생님이고, 박태준 선생님도 한문 선생님이어서 한문 선생님들의 말씀을 많이 들었는데, 그게 한글 서예에도 바로 직결이 된다. 또 김성탁 선생님에게는 페스탈로치 교육철학을 배웠다." 한국의 서예 예술사에서는 서예하면 단연 한문을 꼽았고, 그것이 대세였다. 한글의 수난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후에도 이어졌고, 한글 서예도 오늘날에 와서야 재평가되고 있을 정도다. 사대(事大)의 독이 여전히 오늘날까지 퍼져있는데, 중세에는 중국이, 해방 후에는 일본이, 현대에는 미국이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누르고 있다. 특히 자신의 언어마저 잃어버린다면 영원한 강대국의 속국이 될 건 뻔하다. 자국의 언어가 없다면 그 언어의 모국으로부터 영원히 종속된다는 생각이 세종의 깊은 통찰이었다. 현병찬의 생각 또한 600년 전 세종의 그런 사유와 닿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글은 내 정신의 표현이다. 내가 아는 지식도 내가 쓰는 글도 그렇다. 사실 한글의 경쟁력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세계의 한류 열풍이 그것을 보여 준 것처럼, 과학·기술·경제 등의 분야도 필요하지만 그것에 덧붙여 더욱 중요한 것이 예술이다. 세계문화사에서 한 사람의 예술가가 중요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세 분의 스승은 현병찬의 글씨, 내용, 정신세계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다. 한문은 한자와 문장을 말한다. 한자는 획이 많아 붓의 운용이 다양하므로 거기에서 기교를 배웠다. 한문 문장은 오랜 중국의 전통, 신라 이후 조선의 동국(東國) 문장 전통에서, 사유하는 삶, 한국적 멋과 맛을 배웠다. 이는 다시 제주문화의 대중화를 펼치는 계기가 되었다. 현병찬 자신이 교육자였기에 평교사 시절 당시 교장이었던 김성탁 선생으로부터 페스탈로치 교육철학을 배웠는데, 그 인상이 평생의 그의 교육관을 좌우했다. 교육은 인류애의 근본정신으로서 세상의 빈민을 구제해야 하는 만민 평등의 실천이었다. 교육의 실천은 교사 퇴임 후 한글서예 현장에서도 글씨로 돈을 받지 않고 필요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봉사하는 모습으로 남았다. 중국에서 선보이는 한글 시연. 현병찬의 제주 사랑과 정신 현병찬(1942~ )은 제주시 화북2동에서 태어나 초등교장으로 퇴임을 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었고 한문 서예도 공부했으나 일생을 한글 서예에 몸 담았다. 제주인으로서는 대한민국서예대전 한글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한글로 전국에 제주문화를 알린 공로가 크다. 현병찬의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평생을 성실하게 살았다는 것을 글씨가 말해준다. 궁체와 판본체가 보여주듯이 "부지런한 공(功)은 싯나(있다)"였고, 땐 굴뚝이었기 때문에 따뜻해지고 연기가 나는 법이다. "먹돌도 똘람시민 고망나고" "천리길도 꼬닥 꼬닥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 한글 글씨의 내용도 폭이 넓었다. 노자·중용·주자·도연명에서 마태복음·톨스토이까지, 용비어천가에서 주시경까지, 이규보·서경덕·정철·박목월·도종환·김순이·채바다 등 현대시인들, 곶자왈·바릇궤기·비바리 등 제주의 용어까지, 그리고 제주 노동요·속담·교훈까지 한글 서예의 지평을 넓히고 형식 실험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단어의 어감과 의미와 뜻을 연상하면서 글씨를 쓰는데, 의미를 밝히기 위해 형상을 그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림 글씨이자 글씨 그림인 셈이다. 원래 글씨와 그림은 한 몸이었다. 한자의 상형의 예가 바로 그것을 말해주며, 한글 또한 천지인의 우주관에서 탄생한 것을 말 할 수 있다. 현병찬의 한글 서예는 매력이 있다. 한글은 단순하고 간결해서 문장으로 읽지 않고서는 곧바로 의미를 알 수가 없고 미적인 아름다움이 결여되면 쉽게 잊혀진다. 한글 서예의 깊은 의미는 아름다운 구조와 그 뜻의 전파에 있는데 현병찬은 그 지점에 선 선구자였다. 모든 사람들이 글씨를 쓰고 있지만 그 글씨가 의미와 가치를 가지려면 고정관념과 새로운 현대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때 가능하다. 현병찬이 선비이면서 장인인 이유가 그것에 다가가는 합일의 길이었다. <김유정 미술평론가(전문가)>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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