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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ED 지상전] (10)홍진숙의 ‘잎(leafs)-우도’
오랜 기억을 품은 존재들의 반짝임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입력 : 2021. 01.21. 00:00:00
어느 날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매일 오가는 도심 산책길에서 폭낭(팽나무)들이 무참히 잘려나가는 걸 봤다며 오랜 기억을 품은 존재들의 절명에 아파했다. 그는 제주 사람들과 함께 살며 마음의 그릇을 키워준 그것들이 사라지는 게 슬프다면서 무슨 대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회화, 판화, 그림책을 넘나들며 바지런히 창작물을 길어 올려온 그의 작업엔 그렇듯 공감과 연민이 스몄다.

1995년 첫 작품전 이래 열일곱차례 개인전을 펼쳐온 홍진숙 작가. 전업작가로 세종대 회화과, 홍익대 미술대학원 판화과를 졸업한 그는 4년 전 방송대 농학과를 마쳤다. 이 땅에 사는 나무와 풀에 대한 관심이 미술이 아닌 다른 공부로 눈길을 돌리도록 만들었던 것 같다. 2019년 개인전 '섬을 걷는 시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갤러리 이디의 중견 작가 11인 초대전에 내놓은 2020년 작품인 '잎(leafs)-우도', '족제비 고사리'에도 '섬을 걷는 시간'들이 보인다. 나이가 들면서 제주섬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지고 있는 그의 작업은 이제 두 발로, 가슴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홍 작가는 2017년부터 한 달에 한 번 제주 '바당길'을 걸었다. 매달 20㎞를 걷는 여정이었다. 한 바퀴, 두 바퀴 도는 동안 그의 눈에 나무가 들어왔다. 저마다 다른 형태를 지닌 나뭇잎들은 제주 자연을 새롭게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식물 이름은 몰랐지만 너무도 다채로운 잎들은 자연의 표정 그대로였다. 그는 땅에 떨어진 나뭇잎을 채집했고 2018년부터 모노타이프 기법의 판화 작업에 그 이야기를 풀어냈다.

푸르른 빛깔의 '잎-우도'에도 지난해 여름 비바람 치던 날의 우도가 있다. 바닥에 뒹굴던 땅콩 잎, 구럼비나무 잎 등을 한 봉지 모았고 그것들을 꺼내 모노타이프 채색을 이용해 단 하나뿐인 판화를 완성시켰다. 아크릴판에 잎을 올려놓고 잉크를 입혀 찍어낸 뒤 현장에서 받은 인상을 채색하는 방식이다. "제주에 자생하는 식물들이 10년 후, 50년 후, 100년 후에는 과연 그 자리에 있을까"를 묻는 홍 작가는 "섬을 걷는 시간 동안 느꼈던 빛나는 아름다움을 담아두고 싶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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