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오름. 한라일보DB 근사한 풍경 내면에는 치열한 삶의 현장 탐라순력도에 ‘촐’ 키워 마을 살림 밑천 제주도를 상징하는 여러 풍경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오름이다. 급속한 개발로 해안가의 모습은 날로 어지러워지고 있지만, 중산간 곳곳에 솟은 오름은 아직 제주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몇몇 오름은 휴식년에 들어갈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하지만 오름이 제주도 사람들에게 무엇이었는지 아는 이는 드물다. 이형상은 조선조 숙종 28년(1702) 음력 6월에 제주도 목사(牧使)로 와서, 그해 음력 10월 말부터 1개월 동안 제주도를 순력(巡歷) 하였다. 그 내용을 그림으로 그렸다. 이것이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이다. '탐라순력도'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309년 전, 제주도의 산과 오름의 원초적 모습이 보인다. '탐라순력도'에서 한라산(漢拏山), 성산(城山), 산방산(山房山), 그리고 제주도 여러 '곶'에는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다. 제주도의 산과 '곶'은 용암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3만5000 년 전, 제주도에는 측화산(側火山) 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때 수많은 오름이 태어났다. 오름은 측화산이 폭발할 때 검붉은 빛깔의 자잘한 돌자갈 '송이'로 구성됐다. 송이로 구성된 오름에 수만 년 동안 풀이 자라고 시들기를 반복했다. 그 결과 오름 표면에는 흙이 씌워졌다. '탐라순력도'에 그려진 수많은 오름에는 풀만 자라고 있었다. 제주도의 한라산, 성산, 산방산, 그리고 '곶'은 돌이나 바위의 석산(石山)이라면, 제주도의 수많은 오름은 송이와 흙으로 이루어진 토산(土山)이다. 석산에서는 나무, 토산에서는 풀을 가꾸는 것은 제주도 사람들의 오랜 전통이었다. 제주도 사람들이 오름에서 풀을 가꾸려는 노력은 불길처럼 치열했다. 해마다 음력 2월 중순부터 3월 초순 사이 오름에 불을 붙였다. 이를 '방에'(放火)라고 했다. '방에' 목적은 진드기 구제, 묵은 풀 제거, 나무 새싹의 발본색원(拔本塞源) 이었다. 제주도 사람들은 왜 이토록 오름에 치열했던가.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別防操點(별방조점) 그림 속 '大朗秀岳'(대랑수악)은 지금의 '다랑쉬오름'(383m)이다. '다랑쉬오름'은 세화리 사람들의 소 방목지였다. '다랑쉬오름' 동쪽에는 '아끈다랑쉬'도 있다. '아끈다랑쉬'는 세화리 공동소유의 '촐왓'이었다. 세화리 사람들은 '아끈다랑쉬'의 '촐' 채취권을 해마다 마을 사람들에게 팔았고, 그 수익금은 마을 살림살이 밑천으로 삼았다. 서광리에 있는 남송이오름은 서광리 공동소유 '촐왓'과 '새왓'이었다. '촐왓'은 소의 월동 사료인 '촐'(꼴)을 생산하는 밭이었고 '새왓'은 지붕을 이는 '새'(띠)를 생산하는 밭이었다. 서광리 사람들은 해마다 '남송이오름'의 '촐왓'과 '새왓'을 새끼줄로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촐'과 '새' 채취권을 팔았다. 이렇듯, 제주도 사람들에게 오름은 소의 방목지요, 소 꼴을 생산하는 '촐왓'이요, 초가를 이을 띠를 생산하는 '새왓'이었다. 삶의 중요한 터전이었다. 이를 돌아보려는 노력도 없이 근사한 풍경으로만 남은 오름에는 오늘도 나무만 자라나고 있다. <고광민·서민생활사 연구자>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이 기사는 한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ihalla.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webmaster@ihall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