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내 최초 목마장·유일한 내륙 진성 등 지정학적 요지 제주 기념물 ‘수산진성’ 수산초등학교 담장으로 남아 신과세제·영등제·백중마불림제·군인굿 등 당굿 다양 “제2공항 매듭 통해 마을 만들기 사업 재추진되기를” 서귀포시 성산읍 중산간 일대에 드넓게 펼쳐진 수산평의 들판을 품은 마을 수산1리는 성산읍 관내 22개의 오름 중 다섯 곳이 자리 잡은 그야말로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넓은 들판 가운데 서면 멀리 일출봉을 안고 망망하게 펼쳐진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서 유사 이래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이어왔다. 고려가 원나라의 수중에 들어갔던 시절에는 제주 최초의 목마장인 '탐라목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탐라총관부의 동아막이 수산평에 들어섰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군사 요새가 들어선 바 있다. 조선 초 제주도에 3성(三城) 9진(九鎭)이 설치될 당시 아홉 곳의 진성 중 유일하게 내륙인 이곳에 수산진성을 축성한 것을 봐도 제주 동부의 요지였음이 짐작된다. 진안할망당 제주의 해안이 아닌 내륙에 위치했다는 특징 말고도 수산진성에는 다른 진성 어디에도 없는 슬픈 신화가 전해온다. 봉건시대의 공공건축 대부분이 백성들의 부역에 의해 지어진 것처럼 수산진성도 인근 주민들의 부역과 조세에 기대어 만들어졌다. 이 성이 만들어질 당시 세금을 낼 가산이 없던 한 여인이 나라에 바칠 것이라고 어린 딸 하나뿐이라며 읍소했다. 여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관원들이 빈손으로 돌아간 뒤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성담을 아무리 단단히 쌓아도 연거푸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사고가 이어지는 사이 근처를 지나던 스님이 여인의 딸을 제물로 바치면 성을 쌓을 수 있다는 말을 뱉고 사라졌다. 결국 스님의 말은 현실이 돼 어린 계집아이가 희생을 당한 뒤 성이 번듯하게 완성됐다. 수산진성의 성벽 수산1리의 본향당인 울레마루하로산당은 '울레마루하로산또'를 모신 곳으로 제주도 지정 민속자료 중 하나다. 수산1리, 수산2리, 고성리, 오조리, 성산리, 난산리, 신양리, 시흥리에 이르는 여덟 마을이 함께 모시던 곳인데 근래에는 여섯 마을이 공동으로 섬긴다. 여러 마을이 섬기는 만큼 당굿 또한 다양해서 음력 정월 초이틀의 신과세제, 정월 보름의 영등제, 이월 열사흘의 영등송별제, 칠월 초이레의 백중마불림제, 동짓달 열나흘의 시만곡대제가 있다. 이 밖에도 수산1리 주민들만 참가하는 '군인굿'이라는 마을굿을 정월달 안에 택일해 이 당에서 치른다. 이 밖에도 검은머들당과 신술당 등의 신당도 있어 마을의 지킴이로 자리 잡고 있다. 울레마루하로산당의 당굿 부부바위 이처럼 다양한 신앙과 전설을 품은 천혜의 비경 수산1리는 자랑거리가 많은 마을인데 급속한 사회변동에 따른 농촌 공동화 현상의 격랑을 넘지 못해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부침을 겪어야 했다. 급기야 수산초등학교까지 사라질 위기에 몰리자 고심 끝에 마을에서 60호의 대왕주택을 만들어 취학아동이 있는 외지인들에게 저가로 분양하며 학교를 지켜냈다. 그 뒤 마을 전체인구 1000여 명 중 10%에 이르는 새로운 얼굴들이 인입되며 활기를 되찾았다. 김문식 이장의 말에 따르면 "이주민들이 들어오며 활력이 생기자 여러 가지 마을 만들기 사업을 진행할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알다시피 제주 최대의 현안 제2공항 문제가 터지며 모든 계획이 잠정적으로 중단됐다. 지금으로서는 제2공항에 대한 가부 간의 문제가 완전하게 매듭지어진 뒤에라야 마을을 살리는 일들이 본격화될 것 같다"고 한다. 마을을 걱정하는 김문식 이장의 주름 깊은 수심이 걷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대하며 수산1리의 여정을 마치는 걸음이 자못 묵직했다. 글·사진=한진오(극작가)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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