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416호 선사유적지 자리한 역사 깊은 삼양3동 ‘성창’이라 불리는 포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어촌마을 제주 전통배 제작 ‘배목시’ 선친 유업 잇는 백성찬 씨 ‘멸치 후리는 소리’ 끊이지 않던 마을 바다엔 정적만 환해장성, 4·3성 등 유적지 복원·관리 나서야 할 때 제주의 빛깔은 좀처럼 잠들지 않는 바람처럼 강하고 짙다. 한라산의 녹음이 짙고 질세라 곶자왈의 진초록도 짙다. 돌과 모레가 뒤섞인 땅도 짙은 암갈색이다. 바다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은은한 파스텔톤 연둣빛은 드물고 감청색으로 짙푸르다. 이런 제주의 색을 오롯이 담아낸 검은 모래톱이 만곡을 자랑하는 해변이 삼양해변이다. 제주시의 동쪽 바다 끝을 지키는 마을 삼양동은 설개, 가물개, 버렁개, 매촌, 도련드르 등 여러 마을이 하나로 묶인 행정단위다. 이 가운데 삼양3동이 있다. 근래에는 벌랑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환해장성 4·3성 삼양3동의 운치를 만끽하려면 핸들을 잡고 직접 드라이브에 나서는 것도 좋고 제주시내와 가까운 곳이라 운동 삼아 걷는 것도 좋다. 아련한 추억 속의 향수에 빠지고 싶다면 시내버스를 권한다. 노형동 한라수목원에서 출발하는 331, 332번 버스의 종착지가 바로 삼양3동 포구 앞이다. 버스는 삼양3동이 가까워지면 화북1동과 경계를 이루는 벌랑포구 동쪽으로 뻗은 해안도로로 방향을 튼다. 굽이지는 해안도로를 따라 해묵은 환해장성이 늘어서 있다. 그 너머로 펼쳐지는 망망한 바다의 풍광은 놀랍기 그지없다. 멀리 동쪽으로는 삼양의 자랑 검은 모래 해변 너머 원당봉이 전신을 드러낸 채 바다를 향해 나앉은 모습이 보인다. 오름이 세 겹으로 굽이치며 일곱 개의 봉우리를 만들어냈다는 삼첩칠봉의 진면목을 버스 안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오름의 봉우리들은 원당봉, 망오름, 도산오름, 앞오름, 펜안오름, 나북이, 논오름까지 제각기 이름을 지니고 있다. 종점 정류소에서 내린 뒤 갯비린내 진득한 바람을 매만지며 원당봉을 바라다보다 고개를 돌리면 마을회관이 이 소담한 마을에 깃든 삶의 이력을 되짚어보시라 말을 건네는 듯하다. 마을향사 상량문 버스종점과 마을회관 삼양3동은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다. 사근여, 검은여, 버렁개로 이어지는 세 곳 모두 이른바 '성창'이라고 불리는 포구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지금 남아 있는 곳은 검은여성창 한 곳뿐이다. 검은여성창이 자리한 곳은 삼양3동 버스종점이며 마을회관이 함께 있어 말하자면 마을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검은여성창은 지금까지도 포구의 기능을 오롯이 유지하고 있으며 어선을 비롯한 각종 선박을 수리하는 조선소도 있다. 대를 이어 조선소를 이어오는 이는 다름 아닌 삼양3동의 마을회장 백성찬 씨다. 선친이 옛 제주시 관내에서 가장 이름난 '배목시'였다고 한다. 배목시는 제주의 전통배인 덕판배나 싸움판배 등을 제작하는 선박 제조 기술자로 어지간한 대목장조차도 덤벼들지 못하는 고도의 기술자였다. 백성찬 마을회장의 선친께선 선박 제조 관련 법령이 제정되기 이전부터 근동에 이름을 떨치던 배목시였다. 법령이 제정된 이후 한동안 조천읍 북촌리 해동으로 자리를 옮겨 대동조선소를 운영하다 다시 고향마을인 삼양3동으로 되돌아왔다. 백 마을회장은 선친의 유업을 이어 조선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대단한 보람도 있지만 가장 아쉬운 것은 제주의 전통선박 제조법을 제대로 전수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발동선과 철선이 등장하며 사양 산업이 된 제주 배목시들의 기술은 천덕꾸러기들의 잔재주로 전락했다. 그 때문에 선친을 따라 조선소 일을 하게 됐지만 옛 기술을 터득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한다. 검은여포구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것은 이뿐이 아니다. 검은여성창에는 고인돌이 한 기 있어서 이 마을 해녀들이 잠수굿을 치르는 굿청으로 사용했었는데 사라졌다. 여성의 몸매에 비슷한 자태의 바위틈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던 용천수 새각시물도 해안도로가 만들어지며 사라졌다. 남아있지만 위태로운 지경인 유적들도 있는데 마을 서쪽 해안가를 따라 화북1동까지 이어지는 환해장성이다. 군데군데 무너졌지만 회곽도가 남아있어서 옛 성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화북1동과 달리 복원되지 못한 채 처연한 신세다. 마을 위쪽 4·3성도 비슷한 사정이다. 4·3 당시 주민들을 동원해 축성한 이 성도 복원을 기다리고 있지만 안내문조차 없이 여느 밭담처럼 남아있다. 백성찬 삼양3동 마을회장 "화북은 주공아파트가 들어오고 최근에는 상업지구가 개발되며 연일 변신을 거듭하는데 우리는 점점 인구가 줄어들며 늙고 작은 마을로 전락하는 중이다. 숱해 전 삼양유원지 개발계획이 무산된 이후 소규모 주택단지조차 들어서지 못하는 마을이 삼양3동이다. 그래도 이 마을을 지켜내려고 몇 안 남은 토박이들이 애를 쓰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제주도가 난개발로 시달리는 걸 보면 그냥 이대로가 좋다는 생각도 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지만 마을을 지켜내려는 마음은 지극하기만 해서 마을의 오랜 문서가 담긴 동궤를 여는 손길은 신중하기만 했다. 백성찬 마을회장과 마을의 오랜 문서를 펼쳐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 뷰파인더에 백여 년 삼양3동 벌랑마을의 향사를 건립할 때 정성으로 써 내려간 상량문이 비쳤다. 만세에 번창하기를 바라던 옛 조상들의 기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발길을 되돌렸다. <글·사진=한진오(극작가)>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이 기사는 한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ihalla.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webmaster@ihall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