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당시 아버지를 잃은 것도 모자라 호적까지 뒤엉켜 자식으로 인정 받지 못한 강순자 할머니가 자신의 기구한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이상국기자 "어머니는 '너는 어떵헌 아이니? 다른 아이들은 어멍 봐지민 속상허덴이라도 허는디…'하며 한 마디를 안 한다고 했습니다. 하기가 싫어요. 내가 속상한 말을 하면 상대방도 속이 상하잖아요." 오연순(72·성산 수산) 할머니. 제주4·3 당시 아버지를 잃은 것도 모자라 호적까지 뒤엉켜 자식으로 인정 받지 못한 딸들이 어렵사니 말문을 열었다. 제주4·3연구소 주최로 열린 스무 번째 증언본풀이 마당을 통해서다. '나의 뿌리, 4·3의 진실-내 호적을 찾습니다'를 주제로 4일 제주4·3평화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린 이번 행사는 오 할머니를 비롯해 강순자(77·애월 하귀) 할머니, 김정희(72·애월 고성) 할머니가 4·3 당시 아버지를 잃은 기억과 가족으로 인정 받지 못한 기구한 사연을 증언했다. 오연순 할머니의 아버지 오원보(당시 22세)씨는 1948년 군·경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한 후 광주형무소로 끌려가 1950년 1월 옥사했다. 이후 어머니는 오 할머니가 다섯 살때쯤 재가했고, 그녀는 출생신고도 하지 못한 채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서야 아버지 사촌의 딸로 호적에 올랐다. 결혼 후 오 할머니는 남편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2014년 소송을 제기, 항소 끝에 2019년 7월 비로소 법원으로부터 '오원보의 딸'임을 확인 받았다. 오 할머니는 "첫 번째 소송에서는 아버지 오원보하고 친생자인 것을 확인해주지 않아 항소했습니다. 그때 치매로 정신도 온전치 않은 작은고모가 (법정에 출석해) 판사에게 '내 조카가 맞습니다'라고 해줬어요. 이렇게 아버지임을 확인했어요. 5년 걸렸습니다." 강순자 할머니는 1948년 12월 28일 토벌대가 신엄리 자운당에서 70여명을 학살한 사건으로 아버지 강상룡(당시 28세)씨를 잃었다. 서슬 퍼런 시절이라 어머니는 뒤늦게라도 혼인신고를 하지 못했고, 결국 강 할머니는 외삼촌 호적에 '조카'로 올라갔다. 아버지 호적에 오르기 위해서는 묘를 파야 하지만 그녀는 차마 그럴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상황이다. 강 할머니는 " 아기업개도 하고, 열 아홉에는 육지에서 물질도 했어요. 혼자 살려니 서럽고 외롭고… 희생자 신고를 통해 아버지 위패를 4·3공원에 모셨는데, (나는) 호적에 없다고 유족 신청을 받아주질 않습니다. (아버지 묘) 파면 다시 아버지 거기 못 묻잖아요. 차라리 내가 죽고말지…." 김정희 할머니는 어머니 뱃속에 있던 1948년 12월 18일 아버지 김순(당시 19세)씨가 신엄리에서 총살 당했다. 어머니 역시 임신한 몸으로 군인에게 총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할아버지는 김 할머니가 초등학교 입학할 즈음 '김홍'이라는 가짜 아들을 만들어 어머니와 혼인신고를 시킨 데 이어 김 할머니의 출생신고까지 마친 뒤 김홍의 사망신고를 했다. 김 할머니는 2019년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소송'을 제기,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김 할머니는 "어머니는 2020년 법원으로부터 김홍과의 혼인이 무효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진짜 아버지 처로는 올라가지 못했어요. 지금 법이 그렇게 해줄 수 없다고 합니다. 어머니 살날도 얼마 없는데… 법이 해결해줬으면 좋겠어요." 이날 이규배 4·3연구소 이사장은 "어린 나이에 부모와 형제를 잃고 그들과의 연결고리인 호적조차 뒤엉킨 채 일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뿌리를 찾는 길이 곧 제주4·3의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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