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여 년의 역사 간직한 ‘엄쟁이’라 불린 마을 청년들 힘자랑하던 ‘듬돌’ 장사의 전설 품은 곳 마을 본향당 ‘송씨일뤳당’ 정성 모아 건물로 단장 건강장수마을 선정… 건강센터 교류의 징검다리 바닷가의 풍경이 말 그대로 절경이다. 사시사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애월해안도로를 따라 갯바람에 얼굴을 비비며 걷다 보면 나그네의 발걸음은 어느새 중엄리에 가닿는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갯바위와 해풍에 맞서 우뚝 치솟은 해안절벽을 마주하면 이 섬이 먼 옛날 펄펄 끓어오르며 바다를 뒤덮었던 용암의 결정이 켜켜이 쌓여 산과 들을 이룬 곳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제주바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중엄리의 뒤안길에는 어떤 내력이 숨겨져 있을까? 중엄리 전설지 조배기돌 용천수 새물 마을이 생겨난 유래에 대해서는 420여 년 전 고씨와 양씨 일가가 정착하며 오늘로 이어졌다는 것으로 견해가 모아진다. 고씨와 양씨들은 '대섭동산'이라고 불리는 곳에 정착한 이래 인근 마을이 구엄리와 수산리 등지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오면서 규모가 커지며 대촌(大村)으로 성장한 것이라고 한다. 17세기의 기록은 남사일록에 엄장포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동시대의 지도인 탐라지도와 제주삼현도에도 등장하고 있어서 400년이 훌쩍 넘는 마을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리사무소에 있는 듬돌 중엄리본향 송씨일뤳당 묵직한 듬돌이 청년들의 힘자랑을 했던 것이라면 중엄리 바닷가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들어 올릴 생각조차 못할 정도의 바위를 내던진 장사의 전설을 품은 곳이 있다. 이른바 '마두령과 조배기돌'이라는 전설로 전해져 온 이야기인데 그 사연을 간추리면 이러하다. 설촌유래지 대섭동산 리사무소에 있는 마을 고문서 중엄리는 전설만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주의 여느 마을처럼 신성한 힘을 빌려 마을공동체의 안락을 도모했던 신앙의 메카도 있다. '송씨일뤳당'이라고 불리는 중엄리본향당이 그 주인공이다. 애초에는 노천에 담장을 두른 모습이었으나 근래에는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건립한 건물로 변신했는데 들머리에는 제주의 당이라면 으레 신성의 상징처럼 서 있는 웃자란 팽나무가 있다. 송씨할망이라고 불리는 중엄리본향당신은 구좌읍 송당리본향당의 금백조와 소로소천국의 후손 중 하나라고 알려진다. 고재만 이장 "지난해 제주도에서 지정한 건강장수마을로 선정됐습니다. 덕분에 지방정부에서 다양한 지원을 받게 됐는데 그중 한 가지가 노인회관 2층에 마을건강센터를 만드는 일입니다. 건강센터가 완공되면 그 공간을 이주민과 선주민이 함께 이용하며 다양한 교류를 이어가는 징검다리로 삼을 생각입니다. 그보다 앞서 마을 만들기 사업으로 진행하는 청년회관 리모델링도 같은 취지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뿐이 아니다. 마을의 설촌지로 알려진 해안가의 '대섭동산'에 마을박물관을 만들어 마을의 역사와 전통을 공유하는 거점으로 삼겠다는 구상도 진행 중이다. 애월읍 차원의 지원을 받아 3개년의 계획을 세운 고재만 이장의 구상이 공염불이 아니라는 증거가 이미 리사무소에 자리 잡고 있다.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백여 년 동안의 마을 문서 영인본 전시부스를 만들어 내외에 공개하고 있으니 장차 들어설 마을박물관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더 끌어올린다. 포제를 비롯한 각종 마을제사를 기록한 입의(立議)를 비롯해 마을의 대소사 때마다 소용했던 물품과 금전을 꼼꼼하게 기록한 절목(節目) 등 문서들의 종류도 매우 다양해서 사료로서의 가치도 자못 큰 것으로 보인다. 묵향 짙은 고문서 속에 오롯이 새겨진 옛사람들의 마을사랑이 이렇게 깊다면 그들의 유지를 떠받들어 마을의 전통을 지켜가려는 고재만 이장 또한 그 못지않은 애향심이 있으리라. 하루가 다르게 제주다움이 사라져 가는 오늘날 중엄리가 마을 전통을 꿋꿋이 지켜가는 곳으로 굳건히 자리 잡기를 기대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글·사진=한진오(극작가)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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