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밤새 뒤척이다가 오래 묵혀두었던 연서를 이제야 띄운다"고 했다. 그 말처럼, 1990년 이래 무려 31년 만에 묶어낸 시집에서 시인은 우리에게 사랑의 안부를 묻고 있다. 제주 김승립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벌레 한 마리의 시'다. "만 리 밖 그대에게" "이 먹먹한 심사가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닿았으면 한다"는 시인의 바람이 담긴 시집에 흐르는 주된 정서는 앞장에 실린 '사랑의 이름으로', '벌레 한 마리의 시' 두 편에 응축되어 있다. "만나지 않더라도 꽃은 피고/ 바람은 발걸음을 살금살금 옮겨놓지/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더라도/ 있는 자리에서 사물들은 제 힘껏 삶을 살아나가지"('사랑의 이름으로')라는 대목은 "칼바람조차 아무렇지 않은 듯/ 한 줌 온기의 작은 몸짓으로/ 꽝꽝 언 땅을 씩씩 밀어낸다/ 저 무모함!/ 오랜 잠에 묶여 있던 어린 풀씨들/ 한 마리 벌레의 대책 없는 꼼지락거림에/ 간지럼 타며 아아아 기지개 켠다"('벌레 한 마리의 시')는 구체성으로 이어진다. 이 땅의 사연 속에 변주되고 깊어지며, 때로는 중독된 그의 사랑은 저 멀리는 제주4·3에 닿고, 가깝게는 세월호와 만난다. 조건없이 내어주는 숭고한 사랑도 있다. 시인은 "사랑치고 붉지 않은 게 어디 있나/ 사랑에 어디 삿된 이념 따위 있었겠나"('붉은 섬')며 "내 나라 주인 꿈꾸던 사람들"의 사랑을 노래하고 "나를 살린 밥심이/ 어머니 눈물로 버무린 사랑이었음을/ 새삼 알겠네"('밥심')라며 어린 날을 추억한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들 사이로/ 우리는 더 이상 피지 못한 꽃들을 기억해야만 한다"('우리는 우리에게 거듭 물어야 한다')며 제주 바다에 다시 사월이 오면 사랑의 이름으로 불러줘야 할 그날의 아이들도 그렸다. 그 풍경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 머물고 있지만 시인은 "어깨 겯고 볼 부비며/ 허름한 사랑 한 조각/ 나눠 가질 수 있다면/ 세상은 조금씩 추위를 벗으리"('사랑의 이름으로')라고 했다. 삶창. 1만원.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이 기사는 한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ihalla.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webmaster@ihall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