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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제주마을 탐방] (11)제주시 애월읍 하귀2리
땀 든 갈정뱅이에 신명이 배인 마을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입력 : 2021. 11.29. 00:00:00

웅숭깊은 내력.제주 특유의 전통을 오롯이 간직
번화한 거리 풍경 넘어 깊은 이력 숨겨져 있어

“한국민속예술축제 대통령상 두 번 수상 쾌거”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이주민과 관계 형성 문제

2000년대 이전의 하귀2리를 모르는 이들에게 이 마을은 제주 시내 도심의 여느 번화한 곳이나 다를 바 없는 데라고 여길 확률이 높다. 도심과 조금 떨어져 있는 전원마을 정도의 특색을 지닌 곳으로 비치기 마련이겠다. 그러나 이 마을은 웅숭깊은 내력과 제주도 특유의 전통을 오롯이 간직한 보물이 넘쳐나는 곳이다.

하귀2리 미수동 본향당

오늘날 미수동, 가문동, 번대동, 답동, 학원동 등의 자연마을들이 두런두런 모여 앉아 하나의 리를 이룬 이 마을의 시원은 선사시대로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하귀초등학교에 남아있는 고인돌이 깊은 내력을 증명한다. 역사시대에 접어들어서는 고려시대에 오늘날 하귀1리 등지와 더불어 '귀일현'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니 번화한 거리의 풍경 너머에 깊은 이력이 숨겨져 있는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귀2리는 애월읍 관내 26개리 중에서 인구부터 1, 2위를 다투는 3700여 명이 거주하는 도심 같은 마을이기 때문이다.

하귀2리 학원동 4·3성담

제주의 마을은 신앙권을 중심으로 형성되는데 하귀2리에는 가장 큰 마을인 미수동과 가문동이 제각기 본향당을 간직하고 있다. 미수동 본향당은 마을 안으로 뻗어 나가는 천변의 조그만 언덕 위에 자리했는데 웃자란 팽나무가 당을 품에 안고 있어서 안으로 들어서면 둥지 같은 안락감을 준다. 이 당의 본풀이에 따르면 '노산주부인'과 '신산주영감'이라는 부부신을 모신다고 한다. 가문동 본향당은 바닷일을 하는 어부와 해녀들이 주로 섬기는 곳으로 '개로육서또'와 '오씨 할망'을 모신다. 이 당은 가문동 해녀들의 작업장 바로 곁에 있으며 이 마을 포제단과 나란히 자리해 엄숙한 인상을 자아낸다.

하귀2리 가문동 본향당

미수동 바로 옆 마을인 답동은 '붉은질', '빌레테역', '논골' 등이 하나로 묶인 동네로 논골의 논을 뜻하는 답(畓)에서 이름이 붙여진 마을이다. 번대동은 하귀2리에 속한 마을 중 가장 늦게 생겨난 마을로 곡진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이 마을은 1960년대에 생겨났는데 하귀리의 윗마을인 수산리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설촌한 곳이다. 1950년대 이승만 정부 시절 국가시책으로 제주도에서도 쌀 생산이 가능하도록 여러 곳에 저수시설을 건설했는데 이때 현재까지 남아있는 수산저수지가 만들어졌다. 이 저수지에서 확보한 물을 하귀2리의 '원벵듸'까지 끌어다 대규모의 논을 만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이 때문에 수산리 본동에 살던 사람들이 고향을 잃어 가리산기리산 흩어지는 신세에 직면했다. 결국 쫓겨나다시피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인근에 마을을 새로 만든 것이 번대동으로 이곳 주민들은 사실상 제주에서는 유일한 수몰지구의 실향민인 셈이다. 학원동은 하귀2리 서남쪽에 위치한 '비학이동산'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마을로 제주 4·3의 참상을 겪은 수난의 상징 같은 마을이다. 1948년 겨울 36명이 하루아침에 학살되는 등 수많은 고난을 겪었다.

하귀2리 가문동 포제단

하귀2리에 불어닥쳤던 4·3의 광풍은 비단 학원동의 일만이 아니다. 소설 순이삼춘의 배경지로 알려진 조천읍 북촌리만큼이나 처절한 고통을 겪었으니 크고 작은 학살이 끊이지 않았다. 1948년 5월 25일 가문동 원벵듸 학살을 시작으로 개수동 진수리 학살사건과 외도지서에 잡혀간 이 마을주민들은 구타와 고문을 당하고 타지방 형무소로 끌려가는 등 37명이 희생됐다. 뒤이은 사건은 앞서 말한 비학이동산 학살이고, 그 뒤로도 붉은질 학살, 눈 감으라 사건, 외도지서 서쪽 밭 학살 등이 잇따르며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했다.

하귀2리 가문동 아끈코지 원담

무참한 학살의 상흔을 묻은 채 긴긴 세월이 흐르는 사이 제주에선 4·3진상규명운동과 도민명예회복을 위한 지난한 투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4·3특별법이 만들어졌다. 그 사이 하귀2리는 귀일리와 합쳐졌고 하귀1리는 동귀리와 하나가 됐다. 이들 네 마을은 1993년에 하귀발전협의회를 조직하고 십 년이 흐르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4·3희생자 등의 원혼을 함께 모시는 영모원을 하귀1리에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희생자들의 꽃넋을 위무하는 비문의 한 대목은 이렇다.

"아버지보다 오래 살고 어머니보다 나이 들어서야 여기 모인 우리들은 이제 하늘의 몫은 하늘에 맡기고 역사의 몫은 역사에 맡기려 한다."

영모원은 가닥이 잡히지 않는 이념 갈등을 역사의 몫으로 돌리고 무엇보다 원혼을 애도하는 마음이 앞서는 4·3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지난해에는 72주기 4·3추모식 추념 차 제주를 찾은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참배하기도 했다.

하귀2리 문정언 노인회장

이처럼 광풍의 역사를 지닌 하귀2리의 뒤안길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들의 내력 모두가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문정언 노인회장은 미수동 본향당으로 안내하는 길에 하귀2리가 지닌 문화자산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표현했다.

"우리 마을에 자랑거리가 매우 많지만 그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것이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대통령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쾌거다. 제주도는 물론 전국을 다 뒤져도 없을 거다. 2005년도에는 '귀리 겉보리 농사일소리'로, 2014년도에는 '가문동 아끈코지 원담역시'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귀리 겉보리 농사일소리는 하귀2리의 원벵듸 일대에 드넓게 자리했던 보리밭을 배경 삼아 농사의 전 과정을 일대기적인 놀이로 펼쳐낸 작품이다. 가문동 아끈코지 원담역시는 가문동 바닷가에 지금도 남아있는 원담을 축조하는 과정을 놀이로 구성한 작품이다. 강경선 사무장에 따르면 귀리 겉보리 농사일소리가 제주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뒤 보존회를 중심으로 10여 명 남짓한 젊은이들에게 전수교육이 다달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각종 마을 만들기 사업을 새롭게 구상하기보다 어느 곳에 내어놔도 손색이 없는 두 가지 무형문화재를 주민들과 함께 보존해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직감하게 된다.

이처럼 유수의 문화유산을 보유해 다채로운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급속한 도시화로 총인구의 50%에 이르는 이주민들과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문제라고 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며 인구가 늘어가지만 마을공동체는 그와 반대로 쇠락하고 있어서 적잖은 근심거리인 모양새다. 원벵듸 너른 벌판에 꼿꼿이 고개를 쳐들며 누렇게 익어가던 보리며 원담 가득 은빛 향연을 펼치던 가문동 아끈코지에 기대어 가족처럼 지내왔던 이 마을 토박이들의 삶이 나날이 박제처럼 굳어가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비지땀 물씬 밴 갈정뱅이를 입고 한 목소리로 노동요를 부르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개발의 속도가 조금이 느려지기를 기원하는 저들의 마음이 봄눈 녹듯 녹아내리길 기대한다.

글·사진=한진오(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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