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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마을-참여와 자치의 기록 (1)왜 다시 마을인가
[창간33주년 기획] 개발·이주 열기로 변곡점… 누가, 어떻게 마을 이끄나
진선희·김도영 기자 sunny@ihalla.com
입력 : 2022. 04.22. 00:00:00

하늘에서 내려다본 제주 도심. 마을을 두고 "작지만 그 안에는 사회적 의미의 모든 요소와 행위가 축약되어 있다"는 약 40년 전 '제주의 마을' 시리즈의 한 대목은 여전히 유효하게 읽힌다. 한라일보 DB

전통적 마을지가 품지 못하는 변화 양상
사람과 자치의 눈으로 보는 제주의 마을
낭만적 농어촌이 아닌 이익사회의 얼굴
제주도 마을운영규약 개선 방향 안내서
성평등권과 환경권 등 새 미래가치 담아

1985년 첫 권을 낸 '제주의 마을' 시리즈는 오성찬(1940~2012) 작가가 쓴 이런 글로 책장이 열린다. "혹은 귀양으로, 혹은 정치와 권력에 환멸을 느낀 끝의 유랑으로, 목숨을 걸고 거친 바다를 건너와서 부평초처럼 정착했던 태초의 마을 사람들. 우리의 이 작은 작업은 이들 선민에 대한 애틋한 한 가닥 애정인지도 모른다. 정착 후 이들은 숱한 전설과 일화를 남겼다. 거친 한숨, 고뇌의 숨결은 그대로 민요가 되었다. 쥐어지는대로 붙인 밭 이름, 바다 이름, 언덕 이름들이 그 마을의 역사와 살아온 삶의 궤적들을 짐작케하며 이날까지도 밭이랑의 돌멩이만큼이나 널려있다."

"국내 마을지의 효시"이면서 "도내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향토지 발간 붐이 일어나는 불씨 역할"을 했다는 17권에 걸친 2002년판 '제주의 마을' 시리즈의 홍보 문구처럼 지금까지 제주의 마을에 대한 기록은 이런 시선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제주의 읍·면·동은 물론이고 리 단위로 생산되는 마을지들은 자연환경, 설촌 유래, 지명, 명소, 교육 등 거의 한결같은 목차로 구성됐다. 거기엔 후손들에게 지역의 역사를 알려 애향심과 자긍심을 높이겠다는 바람이 담겼다. 제주 곳곳에서 진행된 그 같은 여정을 통해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이으며 "인류가 모여 사는 최소 단위"인 마을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하는 기회를 줬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제주도 조사보고서, 80년대 마을 시리즈, 90년대 이후 간행이 잇따른 마을지가 아니더라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 마을이 변해온 걸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그 기록들에서 마을의 움직임을 읽기는 어렵다. 큰 길을 내고, 바다가 메워지는 등 무언가의 명멸 과정에 마을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무엇을 했는지 등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 앞에 보여주는 것은 그 종착지일 뿐이다. 마을은 있으나 그 마을을 살아있게 하는 구성원들의 목소리는 가려진 셈이었다. 오늘도 어느 마을에선 동네에 지어지는 시설을 놓고 한목소리로, 때로는 각기 다른 입장이 부딪히고 있을 것이다.

이번 '제주 마을-참여와 자치의 기록' 연재물은 그와 다른 지점에서 마을을 만나고자 한다. 개개 향토지에 실린 그것이 아닌 마을의 의사 결정 구조 등 자치의 관점에서 제주 마을의 양상을 살피려는 의도다.

오늘날 제주의 마을은 각종 개발 이슈와 제주 이주 열기, 인구 편차 등으로 공간의 변화가 세차다. 정착민들의 거주지가 확장되면서 일부 리에선 행정구역을 분리해달라는 요구가 있다. 농어업이 주를 이루며 살던 마을에 관광업 관련 업소가 하나둘 들어서면서 외적인 풍경도 바뀌었다. 행정에서 공모를 거쳐 예산을 대는 마을만들기류의 사업은 갖가지 인프라를 마을에 뿌려놓았다.

마을 재산과 마을별 인구수의 증감도 마을 변화를 재촉하는 주요 요인이다. 이 한편에 공공 문화시설 건립 등 마을 균형 발전에 대한 욕구도 늘어나고 있다. 고령화 등에 따른 기존 마을 시설의 재배치 필요성도 제기된다.

마을의 인적 구성 변화로 이해관계 역시 예전과 달리 복잡다단하다. '수눌음'으로 상부상조해야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건 옛적 일이 되어버렸다. 낭만적 농어촌이 있던 자리에서 이익사회의 얼굴을 한 마을과 마주하게 된다.

이는 마을의 새로운 질서로 나타나고 있다. 연장자가 순번으로 마을 대표를 맡아오던 방식을 유지하는 곳은 차츰 줄어들고 있다. 제주도선거관리위원회에서 이장 선거가 깨끗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하겠다며 '향약부속서 리장선거 표준규정'을 작성·제공한 배경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마을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마을운영규약은 마을자치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핵심 장치 중 하나다. 마을회 규약, 향약, 회칙, 정관 등 마을에 따라 각기 다르게 불리는 마을운영규약에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 마을주민의 자격, 이·통장 등 마을 대표 선출 방법, 투표 유형 등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을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의원회, 개발위원회, 반장회의, 선거관리위원회, 재산관리위원회 등 마을에서 추진하는 특정 사업을 심의하는 의결 기구들의 기능과 역할도 눈여겨봐야 한다. 그것들의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작동 여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최근 제주도는 "제주에 소재한 마을 운영규약 제·개정시 참고하여 마을의 발전과 주민자치 실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마을운영규약 매뉴얼-제주지역 마을운영규약 개선 방향 안내서'를 제작했다. 읍·면·동을 통해 각 마을에 배부하도록 했다는 해당 안내서는 마을의 쟁점 사항별 개선 방향을 다뤘고 새로운 미래가치로 성평등권, 환경권, 문화유산 보전과 계승까지 포함시켰다. 제주도가 이 안내서를 '표준 규약'으로 내놓은 것이 아니라 마을 실정에 맞게 수정 또는 보완해 활용해달라고 '일러두기'에 밝히고 있는 점은 마을집단마다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방증이다. 주민의 자격, 공유재산 등을 둘러싸고 일부 마을 내 갈등이 첨예한 현실에서 기준안 제시가 주민자치를 훼손할 수 있다는 일각의 우려가 반영된 결과다.

다시 '제주의 마을' 시리즈 첫머리로 돌아가면 지금도 유효하게 읽히는 다음의 대목이 나온다. "작지만 그 안에는 사회적 의미의 모든 요소와 행위가 축약되어 있다." 제주도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는 제주의 마을에서 오늘을 들여다보고 내일을 그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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