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아이러니 속에 김녕리가 존재한다. 냇가라고는 한 곳도 찾을 수 없는 지역에 가장 풍부한 생활용수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 지표면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엄청난 양의 지하수가 땅속을 흐르다가 솟아나고 있으니 그러하다. 마을 바닷가엔 셀 수 없이 많은 용천수 구멍이 있다. 그 생명의 근원, 물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삶의 공간을 형성해가는 것은 당연한 세상의 이치다. 일정한 곳에 솟아나는 풍부한 수량이 아니라 지역 전체에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는 용천수. 선사시대 인류라고 해서 이 좋은 환경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기에 마을 곳곳에서 발견되는 고산리식 토기들이나 궤네기동굴, 묘산봉동굴 등 동굴주거 유적이 있는 것은 이 지역이 신석기 시대부터 정착민이 있었던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장굴로 대표되는 땅 밑 지질자원 자체가 풍요를 담보하는 보물이 되어 정주 여건을 확장시켜온 마을이라 할 것이다. 좋은 물보다 값진 보물이 어디 있으랴! 그 물을 중심으로 여덟 개의 자연마을이 모여 옛 명성 그대로 '천하대촌 김녕리'의 후예임을 자부하고 있다. 남흘동에 성새기물, 한수동은 고냥물과 수감물, 용두동은 당올래물, 대충동은 원빌레물, 동성동은 게웃샘물, 신산동은 한질물과 청굴물, 청수동은 한질물과 왕절물, 봉지동은 고냥물. 마을 구석구석을 돌며 취락구조를 관찰하면서 집과 생활용수 사이에 있는 길에 주목했다. 물허벅을 지고 왕래하던 생존의 흐름도이기도 하다. 단순한 마을 안길이 아니라 생활용수의 운반 경로이기도 했던 길들이 그 마을의 동맥이었음을 느껴지게 된다. 집들의 무작위로 들어선 것 같지만 일상생활과 밀접한 불가분의 관계를 고려해 가장 현명한 선택을 취한 결과물들이다. 집과 길들의 배치는 계획되지 않은 자연스러움으로 보이나 이웃과 이웃이 돌담을 경계로 형성된 살아 숨 쉬는 유기체를 닮았다. 개별공간으로써의 가옥과 길을 통한 공동체적 요인의 결합. 그러한 복합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것, 주민들의 빈번한 왕래가 있는 곳, 인구 밀집지역에 준하는 곳을 섬 제주에서는 '가름'이라 지칭해 불렀다. 남흘동에 터줏대감이신 이경환(85세) 어르신의 말씀에 의하면 "내가 어린시절엔 부모님들이 동가름, 서가름이라는 말을 썼어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위치를 이르기도 하지만 길들이 많이 난 곳이기도 하지." 해안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마을이기에 동서로 펼쳐진 정주공간이기에 가름의 명칭도 그렇게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사람이 많이 모여 살았다는 것은 문화적 정체성을 발휘하는 역량이 발휘되었음을 의미한다. 탐라에서 고려, 원 지배 기간 탐라총관부 시기에 김녕현(金寧縣)의 위상을 가진 대촌이었음을 타 지역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옛날 선박을 댈 수 있는 해변 여건이 좋았던 것 또한 지질적 요인이 컸다. 용암이 흘러와 바다와 만나면서 형성시킨 오묘한 방파제 기능. 한개(大浦)가 그 확연한 모습이다. 김녕마을 서쪽 해변에 위치한 천연포구. 기록과 구전에 의하면 여기에서 한반도와 다른 지역들을 왕래하던 배들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곳이었다. 인구 4000명이 넘게 번창했던 제주역사의 중요 지역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외부와의 교류가 빈번한 지역은 다양성을 아우르는 힘이 생성되며, 진취적인 문화가 역동성을 발휘한다. 주민들의 마을 발전에 대한 의지와 실천역량을 보면 조상들의 유전자가 그대로 현실화되어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옛 조상님들로부터 내려온 마을공동체 결속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요를 듣노라면 김녕리의 정신문화 그 저력을 실감하게 된다.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10호 '멸치후리는 노래'의 서우젯소리 대목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특색을 인정받을 수 있는 에너지 넘치는 음악이다. 단순하게 일노래로 들어서 넘길 성질이 아닌, 함께 모여 생업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삶이 어떤 희열에 가까운 생명력으로 일체감을 형성하는 어울림. 자연자원과 정신문화가 마을공동체의 역사성 속에서 융합해 진취적인 근성과 만나 대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는 마을-김녕리. 새벽에 둠북(바다해초) 한 짐을 바닷가에서 하고 오지 못하면 아침을 먹지 않았다는 근면성이 오늘도, 내일도 발전 목표를 향해 줄달음치는 제주인의 '강인함 1번지.' <시각예술가> 김녕로19길 폭낭거리 <수채화 79㎝×34.5㎝> 일주도로가 생기기 이전엔 김녕리의 척추와 같은 도로였다고 한다. 주변이 모두 초가였던 시절, 더위를 피해 저 그늘 아래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 그리는 내내 오버랩 되었다. 집은 현대식으로 바뀌었지만 돌담은 길가와 집을 정겹게 이어주는 듯하다. 동서로 난 이 길에서 마주치며 인사 나누던 사람들. 소달구지가 지나가면 물허벅을 지고 오던 아주머니와 비바리들이 돌담으로 몸을 붙이며 피해주고. 저 팽나무 그늘 아래 부채를 들고 더위를 피하던 할아버지는 '물 한 사발 주고 가라'며 농을 던지는 모습. 저 아래서 나누던 이야기는 얼마나 아름다운 이웃들의 이야기였던가. 이웃을 걱정해주는 마음들로 수놓아진 극복의 공동체 마당을 그렸다. 저 길가에 부서지는 뙤약볕보다 눈부신 수눌음공동체의 광채를 마주하고 싶어서. 여기 김녕리 마을 안길을 통하여 느끼게 되는 잔잔한 감동은 느린 변화가 가져오는 현명함이라 생각된다. 갑작스런 혁명의 공간이 아니라 점진적 변화를 선택한 사람들의 길을 눈부신 태양광선과 함께 찬탄하고자 하는 것이다. 궤내기굴 신목의 아침 <수채화 79㎝×34.5㎝>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는 동굴. 학술적 판단으로 기원전 5세기까지 어느 일정한 시기에 주거공간이었다. 중세 이후 제의를 행하는 신성한 장소로 변모해 조선시대에는 '돗제'라고 하는 무속신앙 형태의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이 아침, 입산봉 위에 해가 솟아 돗제정신을 비춘다. 오름의 서쪽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그늘 속에 있지만 햇살의 시간은 밭담들까지 아름답게 깨워낸다. 멀리 해안선에 김녕해수욕장이 가는 선으로 보이는 곳. 김녕리는 깊은 역사와 함께 이렇게 빛나기 시작한다. 나눔문화의 성지로 거듭나기를 염원하면서.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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