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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3)애월읍 봉성리
경쟁력있는 경관 자원과 인품이 살아있는 마을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입력 : 2022. 06.17. 00:00:00
한라산 노로오름(해발1068m)에서부터 평균 폭 2㎞ 정도로 길게 내려와 도너미오름(어도오름)에 이르는 큰 마을이다. 마을 하나가 무려 아홉 개의 오름을 거느리고 있다면 쉽게 면적이 이해되리라. 4·3 이전까지 11개의 자연마을이 합쳐져서 봉성리를 이루고 있었다. 소개령으로 불타버린 6개의 마을 이름에서 참으로 제주적인 향기가 풍겨난다. 자리왓, 열리왓, 몰팟(마전동), 고드리왓, 지름기, 상시마를이라는 생존의 터전이 파괴되었다. 이 곳에 살던 1700여 명의 주민들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주거 공간을 잃은 것이다. 풍경화 그릴 곳을 찾아 마을 냇가를 중심으로 농로를 답사하다 보면 밭 모양이 집터 정도로 보이는 곳과 돌담길 옆으로 대나무가 무성한 곳을 많이 목격할 수 있다.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고 밥 짓는 냄새가 나던 곳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농사지으며 순박하게 살아오던 사람들이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비극을 맞이했다면 그 가해자들은 어떠한 명분과 이념을 가지고 변명을 한다손 죄악을 저지른 것이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설 속에는 무형의 정신적인 실체가 녹아 있곤 하는데, 마을 어르신들을 통해 듣게 된 '부저리터' 전설이 흥미롭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때는 고려시대 부저리라는 엄청난 부자가 살았다. 그가 살았다는 터가 아직도 마을 범위 안에 존재하고 있고. 어느 정도 부자였는지 설명하는 표현들은 다양하지만 당시 이 섬에서 가장 큰 부자였기에 모든 그릇이 금과 은으로 된 것이었으며 발에 흙이 묻지 않도록 수 십 명의 하인들이 부저리가 걸어가는 앞에 멍석을 깔아드렸다. 드라마틱한 대목은 3만 명의 군사가 들어와 군영을 설치하자 보유하고 있던 곡식으로 며칠을 먹였다고 한다. 문제는 싸움을 마치고 한반도로 돌아가면서 장수들이 '이런 자를 놔두면 후환이 생길 수 있겠다'며 죽여 버리고 갔다는 전설이다. 과장된 표현으로 흥미를 끄는 것이 전설이라지만 이 스토리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부유함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농산물로 이룩했다는 것은 토질 자체가 여타 지역의 소출량보다 많았음을 의미한다. 영웅이 등장하는 전설이 아니라 큰 부자에 대한 전설을 대대로 이야기 하며 부농의 꿈을 꾸던 사람들. 실질적으로 섬 제주의 선인들에 의해 토질 좋은 등급을 일 강정부터 시작해서 여기 봉성에 '4다중이'라고 해 소출량이 막강한 지역임을 인정했었다. 그래서 다른 마을과 정주공간이 비슷한 면적임에도 11개의 자연마을이 존립할 수 있었다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과도한 욕심이겠지만 힘 좋은 토양을 포함한 봉성리의 경지면적을 문화재적 가치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경관 자원은 임야와 오름들을 포함해 엄청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마을을 관통해 흐르는 건천을 중심으로 오묘한 동선을 그리며 펼쳐진 농로는 농업경관자원을 통한 트레킹코스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깔끔하게 정비작업을 한 냇가 공간이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고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있지만 아직도 건천에 남아있는 자연적인 요소와 곡선이 흘러가듯 하천 양옆에 석축작업이 된 공간을 활용한다면 색다른 조경공간으로 탈바꿈할 여지가 충분하다. 힐링 공간으로써 봉성리의 자연과 농로트레킹은 다양한 오름에서의 풍경들과 함께 전략적으로 연계시켜야 할 귀중한 자산이다.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새별오름 축제시설을 봉성리에서 활용해 마을만들기 차원의 4계절 관광지로 업그레이드시키는 사업이다. 주민 자발성이 가진 잠재력이 어떤 공익적 성과를 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는 쌓여 있으니까. 좀 더 긴 안목에서 행정적으로 봉성리의 가치를 파악하고 농외소득 증대에 기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일자리 창출에 필요한 요소들을 집중적으로 연구개발 해야 할 타당성이 충분하다.

일제 강점기에 쓰던 어도리라는 마을 이름을 봉성리라고 바꾼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인물이 많이 배출되는 마을이 됐으면 하는 소망이었다. 그 뒤로 사람 자원이 더 풍요로운 마을이 됐다. 우연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내려온 온화한 성품의 선비 기질과 교육열이 마을공동체 분위기와 결합해 이뤄낸 결과이며 품성을 우선시하는 마을풍토의 소산이다.

어림비길 오래 전 비료창고
<수채화 79cm×35cm>

비가 개이고 눈부신 햇살이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변덕스러운 날. 멀리 한라산 방면은 구름 안개에 가려져 있고, 봉성초등학교 서쪽에서 어음리로 가는 길가에서 1975년경에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지었다는 비료창고를 만났다. 현무암을 돌담 쌓듯이 쌓아 가며 사이사이에 시멘트 몰탈을 발라 완성시킨 건물. 그 시기엔 마을 안에 우뚝 솟은 높이였으리라.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상황에서 얼마나 뿌듯했을까! 또한 혁명적인 농업 방식의 변화에 희망차 있었을 것이다. 돗통시에서 거름을 생산해 퇴비를 써서 밭농사를 짓다가 이를 대신할 화학비료가 생겼고 이를 대량으로 쌓아둘 마을공동창고가 생겼으니. 거름 마련에 투입할 노동력과 시간을 다른 농사일에 쓸 수 있으니 생산량 증가에서 오는 효과는 이미 예측되는 일. 4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당시 30세 청년은 70대가 됐고. 비료창고도 나이를 먹었지만 돌로 쌓은 덕분에 외모는 낡았으되 구조적인 견고함은 앞으로 수 백 년을 끄떡없을 것 같다. 농경마을 봉성리를 대표하는 살아있는 역사. 길 건너편에 있는 초등학교에 손자 손녀들이 배워야할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역사적인 업적이라고 하자. 어떤 급격한 변혁의 시기에 수용하고 대응했던 공동체정신을 이 창고건물이 상징한다. 화려하게 앞서가는 가치에 대한 탐닉이 정작 우리 시대가 이룩한 의미 있는 '도전의 탑'을 보잘 것 없는 퇴물 취급을 하는 것은 아닐까 반성하면서 그렸다. 마을문화재는 주민의 삶과 괴리되지 않은 이런 것이다.



아침 햇살로 빚은 한라산
<수채화 79cm×35cm>

풍경(風景)이란 이런 것. 바람은 시간성이다. 움직여 흐르니 그러하다. 볕, 해를 뜻하는 景과 만나서 태양광선의 시간성을 통하여 자연공간의 변화상을 파악하고 느끼는 존재요 행위들로 받아들여진다. 그 것을 그린다는 것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의 문제일 뿐.

이 섬에서 한라산을 풍경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방법은 무한대에 가까운 가능성을 보유하였다. 위치의 변화와 시간의 변화는 한라산에게 오묘한 신비감을 부여하여 우리를 탄복하게 하는 것. 하지에 가까워질 때, 새벽에 봉성리로 달려가 여기 이 지점에서 바리메오름과 새별오름 사이, 멀리 아침햇살을 맞이하는 한라산을 바라본다. 요즘이라야 하는 이유는 일출의 위치가 최대한 북쪽으로 치우쳐 있어야 한라산은 이러한 신비한 태양광선 속에서 환상적인 색채로 빛나게 되는 것이다. 바리메 오름 뒤쪽은 이미 눈부신 햇살로 가득하거니와 아직 여기는 잠이 깨지 않은 초목들이 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분위기다. 임야 목장지대의 시원스런 공간감에 오름들의 곡선이 미세한 회화적 농담 변화를 드러내는 여명에서 해돋이까지. 거대한 시각적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봉성리의 이 장소를 소중한 가치의 영역에 편입시켰다.

제주의 숱한 절경들이 나름대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물하지만 바리메오름 뒤에서 떠오른 태양이 연출하는 빛의 향연을 웅장한 대자연 속에서 감상 할 수 있는 절묘함과는 견줄 상대가 되지 못한다. 수채화의 특성을 살려 표현하다보니 현장성과는 다른 색다른 그 무엇을 찾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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