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읍 고내봉에 이전된 김성조 장군 묘비. [한라일보] 역사인물은 중앙과 지역을 통틀어서 역사적 사건과 연관이 있거나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특별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시대를 넘어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고 추모되는 대상이다. 특히 역사인물은 지역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존재이자 지역의 주요한 역사자원으로 이해되고 있다. 지역주민을 화합시키는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고 지역 발전을 위한 자원으로 활용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이처럼 지역의 역사인물을 발굴하고 선양하는 일은 뜻깊은 일이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다가서야 한다.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 김성조 장군 옛 묘비 을묘왜변은 소수의 군사로 다수의 왜구 침공을 막아낸 흔치 않은 전투라고 볼 수 있다. 크게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불안정한 제주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문인이 아닌 무인 출신 목사를 파견했다는 사실도 중요한 요인이다. 잦은 왜구의 침입에 따라 어느 정도 준비는 했다고 봐야 한다. 을묘왜변에 등장하는 역사 인물은 1555년(명종 10년) 제주 목사가 조정에 올려보낸 장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날랜 군사 70인과 목사 김수문, 정로위 김직손, 갑사 김성조·이희준, 보인 문시봉, 정병 김몽근이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 1556년(명종 11년) 6월 16일 기사에는 판관 이선원도 지난해 왜적을 포획한 공으로 이미 승서(陞敍)했다는 기록이 있고, ‘역주 탐라기년’에는 대정 현감 공사검을 판관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들 또한 을묘왜변 과정에 참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말을 타고 왜구를 물리치는 치마돌격대 삽화 왜구와 격전을 벌이는 치마돌격대 삽화. 제주도, 제주연구원 제공 각 인물의 역할을 살펴보면 목사 김수문은 무반이었으며 제주를 방비하는 책임자로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고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다. 김수문 목사와 관련된 기록은 이원진의 ‘탐라지’와 담수계의 ‘증보 탐라지’, ‘국역 증보탐라지’, ‘역주 남사록 上’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로 왜적이 제주성을 포위했을 당시 날렵한 정예병을 이끌고 진격해 왜구의 목을 베거나 사로잡고 왜적의 배 9척을 포획했다는 내용이다. 판관 이선원과 공사검은 을묘왜변에서의 구체적인 활약을 찾을 수는 없다. 다만 당시 제주목에 소속된 판관과 현감이었으므로 중익(中翼)과 우익(右翼)을 담당하면서 목사를 보좌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군관 강여는 목사와 함께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 을묘왜변 이후 왜구가 재차 침입했을 때(‘명종실록’, 1555년, 명종 10년, 9월 12일 기사) 조정에 보고 한 내용을 살펴보면'김수문이 신들에게 군사를 거느려 배를 타고 진격하게 했습니다. 총통(銃筒)을 가지고 적선을 불사르니 적왜가 모두 타죽고 빠져 죽었으므로 드디어 54급을 베었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수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을묘왜변 당시에도 왜선 9척을 포획하는 해상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제주성을 포위한 왜구와 직접 맞서 승세를 이끈 것은 70명의 날랜 군사였다. 특히 말을 타고 돌격하면서 적을 무너뜨린 김직손, 김성조, 이희준, 문시봉의 역할은 실록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기병으로 정로위, 갑사, 보인 신분이었다. 김직손은 정규군에 해당하기 때문에 목사와 함께 내려왔을 것으로 보인다. 이희준의 경우 ‘명종실록’에 언급된 이후 다른 기록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김성조와 문시봉은 읍지류와 족보 등을 통해서 제주 출신임을 확인할 수 있다. 김성조와 이희준은 제주 출신 갑사의 신분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김성조가 건공장군을 받았다면 실록에서 같은 신분에 있었고 동일한 공훈을 인정받는 이희준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봐야 한다. 보인 출신 문시봉의 공훈은 사료에서 확인할 수는 없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족보에서는 건공장군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외부 침입으로부터 제주 지켜낸 인물들 외면 당해 을지류·문집 등 관찬사 외 자료 통해 인물 조사해야 당시 정병이었던 김몽근은 왜장의 등을 쏘아 명중시키고 쓰러뜨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정면에서 왜장을 활로 쏘아 쓰러뜨리는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의무 군역을 치르던 정병이므로 제주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인물을 기억하는 방법에는 다양한 방식이 동원된다. 지금껏 살펴본 기록에 의존하는 방식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구비설화를 통해서 전승되는 이야기도 있다. 을묘왜변과 관련된 제주의 인물들은 관찬의 기록에서도 중요하게 대접받지 못하고 구비전승되는 설화나 민속에서도 그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제주를 지켜낸 역사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제주사람들에게서 조차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명종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1555년(명종 10년) 7월 7일 기사를 살펴보면 '김직손 등 4인이 돌격한 공로도 역시 작은 것이 아니나, 이는 경이 몸소 사졸에 앞서 칼날을 무릅쓰고 돌진해 그들의 용맹을 고무시킨 소치가 아니겠는가. 주장(主將)과 부장(副將)은 같지 아니하다'라는 기사가 보여주듯이 제주사람 보다는 중앙에서 파견된 목사의 역할을 높게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이후 현대까지 많은 제주 출신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으나 대체로 관료나 충·효·열과 연관된 인물들이 거론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조정의 역사인식은 말을 바쳐 공신이 되거나 굶주린 제주 백성을 구한 의녀처럼 통치에 필요한 만큼만 기억하고 재생하려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자료의 미비로 을묘왜변에 참가했던 제주 출신 인물의 논공 내용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당시 제주 출신 4인의 주요 인물들의 삶의 궤적, 보직과 의미, 사회적 위치 등은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만을 갖고는 자세히 파악하기가 힘들다. 남아 있는 일부 사료 또한 관료 중심으로 기술되면서 제주인의 자발적인 헌신과 노력에 대해서는 다소 낮게 평가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제주 출신 인물들에 대한 조사는 관찬사뿐만 아니라 읍지류나 문집 등을 통해서 보완할 필요가 있다. <김석윤 제주대학교 강사>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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