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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20)애월읍 수산리
산 따라 어질고 물 따라 지혜로운 마을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입력 : 2022. 10.21. 00:00:00
옛 이름 '물메'라는 명칭이 정감이 있어서 지금도 자주 호칭되는 마을이다. 한자로 바뀌면서 수산리가 됐다. 주변에 5개 마을이 둘러싸여 있는 마을. 동북쪽에 하귀2리, 동쪽에 상귀리, 남쪽에 장전리, 서쪽에 용흥리, 서북쪽에 구엄리와 경계를 이룬다. 안으로는 예원동, 상동, 당동, 하동 이렇게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돼져 있다. 가장 쉽게 수산리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단일 리 단위에서 그 마을 학생으로만 초등학교가 운영되는 농촌마을. 단순하게 인구의 측면이 아니라 삶의 터전에 대한 견고한 신뢰로 받아들여진다.

다양한 자료들을 종합해 마을 어르신들이 설명하는 설촌의 역사는 700여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와 항파두리성을 쌓을 때, 주변 마을 주민들을 동원해 부역을 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주변마을의 실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기록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수산리가 얼마나 유서 깊은 마을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가 있다. 수산곰솔이다. 천연기념물 441호, 400년 전 어느 집 뜰 안에 심었으나 집이 없어진 후에 강씨 선조가 관리했다고 전한다. 수산리 주민들은 마을을 수호하는 수호목이라 믿고 잘 보존해 왔다. 눈이 내려서 덮이면 형상이 백곰 같다고 해서 곰솔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장마철에 저수지 수위가 올라가면 늘어진 가지가 물메 닿아서 마치 수산봉에 사는 곰이 물을 마시러 내려온 형상이다. 옹골찬 기품이야 말로 수산리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들에 게 호연지기를 심어주는 역할모델이 됐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나 이 신비감을 풍기는 소나무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나무의 입장에서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다.

물메오름 아래 방대한 수량을 가진 수산저수지는 쓰라린 역사가 잠겨있는 곳이다. 원래 이곳에는 70세대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서 정겹게 살아가던 마을이 있었던 곳이다. 1957년 3월, 중앙정부의 탁상행정은 식량증산을 목적으로 한 농업용저수지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속칭 답다니내를 막고 저수지 공사를 시작해 1960년 12월에 준공했다. 원뱅디에 거주하던 마을 사람들을 비롯해 수산리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당시 자유당정부는 공권력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야비한 수단을 가지고 해당 주민들을 겁박해 반강제로 몰수했다. 마을 어르신들의 회고에 의하면 강하게 항거하는 농민들을 협박하기 위해 4·3 당시의 행적을 물으며 '국가시책에 반대하면 빨갱이 아니냐?'고 윽박지를 땐, 그 트라우마에서 오는 공포감에 도장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수산저수지 수면에 비친 수산봉을 바라보노라면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는 할망들과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섬 제주의 유일한 수몰마을의 역사. 반강제적으로 건설했다는 것이 사실임에도 법적으로 행정적으로 아무 문제없다고 하고 있다.

행정주도로 만든 저수지라면 그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해야 함에도 농업생산성 증대에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다. 사업목적의 관점에서 방치에 가깝다. 지금은 어떠한가. 농어촌공사가 관리하는 공공자산이지만 농업용수로 사용되는 물은 없다시피 하다. 농업용수로 사용되지 않는 물을 농어촌공사가 관리한다는 사실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세월이 흘렀다. 경관자원의 관점으로 관광분야에서는 바라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 마을공동체에서 활용해 관광자원화 시키려고 해도 국가소유이기 때문에 방법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제주'특별자치'도 특별자치의 입장에서 제주도정이 나서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 할 수는 없는 것인가?

송두한 수산리장에게 마을의 가장 큰 자긍심을 묻자, 대답은 "물하고 산 아닙니까!" 마을이름 자체라는 것이었다. 마을 풍광과 주민들의 심성이 동일체라는 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 명쾌한 일갈에 듣는 마음이 숙연해졌다. 옛 선인들의 가르침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마을.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知者樂水)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자긍심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다양한 마을공동체 사업으로 일취월장하고 있는 미래지향적인 수산리의 꿈을 바라본다.

그 꿈을 향한 의지가 마을공동체 구성원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고, 온화한 성품의 정겨운 이웃들이 한 편의 서정시처럼 오늘을 써내려 간다.

<시각예술가>

예원동 가을 길
<수채화 79cm×35cm>

청명한 시월의 태양광선이 오묘한 공간적 갈림길에 부서진다. 아스팔트길은 내리막이고 농로는 오르막이다. 각도는 15도 정도. 길의 갈래로 생각하면 네거리다. 시점의 오른쪽 언덕을 감아 돌아가는 곡선길과 차도가 아주 살짝 겹쳐서 어느 방향으로든 갈 수 있는 구조다. 멀리 하늘과 땅 사이를 이어주는 두 개의 오름에서부터 풍경은 여기 길바닥 그림자까지 달려왔다. 시선이란 물상과 물상이라는 진주를 구멍을 뚫어서 꿰매는 감성적 기능이라는 것을 이 농촌마을 풍경에서 입증하고 싶었다. 맑음은 자연에 존재하는 가장 최적화되고 특별한 기능이다. 그 속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저 맑음에 녹아들어 밝을 것이다. 수채화로 표현 할 수 있는 거리감의 단계들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 그 시험대를 제공하고 있는 풍경이다. 시험이라면 합격하고 싶은 욕구로 그렸다. 거친 암반들은 동양화 필법을 준용해 돌 자체에 생기를 느끼도록 했다. 농촌마을의 평화로운 오후. 언덕 그림자 속에서 바라보는 밝은 세상은 살아있다는 희열이며 찬란한 환희다. 오래전부터 그리고 싶었던 두 갈래 길.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아주 미세해 자연스러운 발걸음의 선택 공간. 무리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안타까움이 있다면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옮겨지는 이런 길을 걸으며 어떻게 살든 차이가 그리 크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되새김 했으면 좋겠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행복. 이 풍경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이 가을 햇살 속에 그렇게 산다.



곰솔과 한라산의 만남
<수채화 79cm×35cm>

이런 만남도 있다. 화면이 줄 수 있는 우매함이 있다. 사각 틀 안에 넣어야 하기 때문에 화면 안에 등장하는 모습들로만 파악하게 되는 것. 여기에 보여지는 소나무는 수산리 곰솔을 몰랐을 경우 몇 개의 소나무로 짐작하여 판단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림으로만 봐서 누가 한 개의 소나무 윗부분만 그린 것으로 볼 것인가? 하지만 분명 400년 넘는 수령의 곰솔이다. 하루하루를 살아 이 모습이 되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의 몇 배를 살았기에 저리도 한라산과 어울리게 되는가 싶어서 그렸다. 서쪽으로 기운 햇살을 가까이서는 곰솔이 받고 멀리서는 한라산이 받는다. 딱 두 개의 주제가 한 화면에서 만나게 하려니 이런 파격적인 구도가 만들어졌다. 가로세로 비례의 딜레마는 곰솔 전체를 보여주지 못하는 형국으로 몰고 갔으나 한라산의 정적인 공간에 대비하여 소나무가 지닌 엄청난 공간 짜임은 오히려 동적인 역동성으로 보인다. 소나무 가지와 솔잎들 사이사이 뒤로 수산저수지 물빛이 살짝살짝 드러난다.

산과 물, 그리고 소나무.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 중에 솔잎에 들어와 반사하는 해까지 포함하여 네 개가 그림 속에 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한라산의 능선과 기상이 수산봉 아래 곰솔과 만나면 그 느껴지는 시간성이 사람을 겸허하게 한다. 빛 중심의 주제의식을 강조하다보니 다양한 생략법을 추구하였다. 아이와 같은 궁금증이 그리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사람이 400년 살면 어떻게 되나?' 세상은 정해진 수명의 결합체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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