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황인숙 그렇게 떠난 그렇게 보낸 폐기종이여, 공동(空洞)이여, 덧없음이여, 그 게토여 슬픔과 부끄러움이 간헐적으로 불그죽죽 떠오르는 얼굴이여 구역질이여, 생이여, 어쩐지 비루함이여 - 내가 죽을 때 옆에 있어줘야 해! - 그래 내 사랑, 네가 죽을 때 내 옆에 있어줘! *시 '약속' 부분 삽화=써머 말문이 막히나 우리는 말의 주인인 적도 없고 말을 내 편으로 만들 재간도 없다. 가슴을 쥐고 코를 박은 채 누운 당신의 뒷모습을 봤을 뿐이다. 가가호호 약속은 만발하지만 담팔수 잎은 한 장씩 지고 당신이 죽으면 곧장 따라 죽겠어요, 라는 말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런 지독한 사랑도 때가 되면 문을 닫고 만다. 죽음이여. 네가 알아보는 사람은 누구이며, 너에게 넘어가는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내 사랑은 슬프다. 내가 죽을 때 내 옆에 있어 줄 수 없게 된 사람. 당신의 약속은 불발. 오, 불발이란 얼마나 많은 벚꽃들이 져야 하며 빗줄기들이 산을 찢으며 내려와야 하는가. 내 슬픔과 부끄러움을 타고 탈탈탈 밤거리를 헤매는 사랑한다는 말은 이제 늦었다. 고인이 되었다. 그러니 '구역질이여, 생이여, 어쩐지 비루함이여'. 내 약속 또한 동시 불발돼 벚꽃 죽고 벌건 짬뽕은 식어 문 앞에 놓였다. 한 쌍의 가락지는 영문도 모른 채 달빛 내리는 책상 위에 포개져 있다. <시인>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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