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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 제주대첩, 망각에서 기억으로] (1)다시 제주대첩 속으로
제주 바다 넘어 동아시아 평화 지킨 역사 잊지 말자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입력 : 2023. 04.21. 00:00:00
지난해 한라일보 ‘제주 유일의 승전 역사…’ 전문가 연재 이어
올핸 1555년 을묘년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묻는 작업

수난 아닌 제주가 일군 값진 승리… “지역 역사 재인식 계기로”

[한라일보] 약 500년 전 그때로 향한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지금 여기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살피면 우리가 누구인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그려볼 수 있다.

돌담 아래 너른 제주바다를 향해 앉아있는 자그만 빗돌에 이런 문구가 보인다. "제주 명종 10년(1555) 6월 27일 1000여 명의 왜구가 40여 척의 적선에 분승, 화북포로 침입하여 제주성 침공을 시도하면서 3일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가 을묘왜변으로, 제주 군관민(軍官民)의 기개와 일체심을 동력으로 왜구를 격퇴하여 대승을 거둔 역사적 사건이다. 화북포는 제주대첩의 시작점이다." '제주특별자치도' 명의로 2022년 12월 새긴 '을묘왜변 제주대첩' 표석은 올해 1월 제막식을 통해 '제주시 화북1동 1619-8 인근 공유수면 매립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화북포구에서 바라본 제주 바다. 이상국기자

▶명종실록이 기록한 16세기 제주 그날들=조선전기의 을묘왜변 제주대첩은 1555년 명종실록 6월 28일부터 10월 21일 기사까지 등장한다. 거기엔 흉년으로 제주 백성들이 힘든 나날을 보내던 시절이었지만 평상시 군비를 잘 유지하고 일심동체로 적을 공격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명종실록을 출발점으로 전근대, 근현대 사료에 제주대첩이 기록됐으나 분량이 짧고 그 수가 10종 정도여서 전모를 파악하기엔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1981년에는 김병하의 '을묘왜변고'가 발표됐지만 관련 연구 확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런 중에 제주시 이도1동 오현교 한편에 2000년 12월 '을묘왜변전적지' 표석이 세워졌다. 제주시가 한라일보사유적지표석세우기추진위원회와 함께 설치한 검은 빗돌은 미력하나마 1555년 을묘년의 그날을 도심에 불러냈다. 제주도기념물로 지정된 제주성지를 가운데 두고 제이각 남쪽 골목길에는 2016년 이도1동주민센터에서 제작한 '을묘왜변과 제주대첩'이란 벽화가 자리 잡았다.

2년 전에도 이를 조명하는 작업들이 이어졌다. 2021년 한 해에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등이 펴낸 '건공장군 김성조 자료집', 을묘왜변 답사길을 제안한 제주도와 제주연구원의 '숨겨진 역사 유랑, 치마돌격대', 제주에 이순신 장군과 같은 인물 이야기가 있다는 걸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에게도 알리고 싶어 썼다는 박재형 작가의 동화 '을묘왜변의 영웅, 김성조 장군'이 잇따라 나왔다.

지난해에는 전문가들이 집필을 맡은 '제주 유일의 승전 역사 을묘왜변 현장을 가다'란 한라일보 연재물로 잊힌 역사를 깨웠다. 을묘왜변의 재조명과 역사적 의미, 조선전기 왜구와 제주의 방어 체계, 을묘왜변과 역사 인물, 문화기억으로 전승하는 을묘왜변 승전 이야기를 차례로 다뤘고 9월 말에는 제주도·제주연구원이 주관·주최하고 한라일보가 후원하는 '을묘왜변과 지역사회의 대응, 역사문화자원화' 주제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제주성지 인근 골목길에 있는 '을묘왜변과 제주대첩' 벽화. 제주시 이도1동에서 제작했다. 이상국기자

제주도와 제주연구원은 뒤이어 '을묘왜변과 제주대첩'이란 단행본을 묶었다. 이 책에서 홍기표 전 성균관대 사학과 겸임교수는 이 사건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짚었다. "을묘왜변 제주 전투는 조선시대 들어와 제주가 처음 겪은 대규모 외적의 침입이었고, 제주민은 이를 대첩으로 이끌어 시련을 극복하였다. 이는 비단 제주만의 승리가 아니었고, 조선 을묘왜변의 최종적 승리로 귀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을묘왜변 제주대첩은 일본과 한반도 및 중국과 연결되는 해상 요충지 제주를 왜구로부터 지켜냈다는 점에서 당시 동아시아 평화 정착에 큰 기여를 했다." 만일 그 싸움에서 제주가 패배해 제주성이 함락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의 지원군이 파견되기 전까지 왜구들에 의한 제주사람들의 피해가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더욱이 해상 요충지인 제주가 왜구의 손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동아시아 정세에 커다란 지각 변동을 불러올 일이었다.

지난 1월 화북포구에 '을묘왜변 제주대첩' 한글 표석이 세워졌다. 화북포구는 제주대첩의 시작점이 되는 곳이다. 이상국기자

▶학술연구에서 연극 무대까지 관심 높아져=국내 최대 연극축제로 오는 6월 제주에서 막이 오르는 제41회 대한민국연극제의 개막 공연작은 다름아닌 '치마돌격대'로 정해졌다. 을묘왜변 당시 김직손, 김성조, 이희준, 문시봉 등이 말을 달려 적진으로 뛰어들어 제주에 몰려온 왜구를 무찔렀던 장면이 무대에 올려져 전국의 관객들과 만난다. 제작진은 역동적인 움직임과 갖가지 도구를 이용한 퍼포먼스적 요소를 더해 당시의 치열했던 전쟁 상황을 담아낼 것이라고 했다. 공모를 통해 출연 배우를 모집했고 5월부터 연습이 예정됐다. 사단법인 질토래비에서는 제주성지, 남수각 등 을묘왜변의 현장을 답사하는 여정을 이어왔다.

이 같은 일련의 관심과 노력 속에 을묘왜변을 새롭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제주의 역사를 수난사로 여겨온 현실에서 지금이야말로 제주사회에 미처 닿지 못했던 승전의 기록을 전하고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남길 것인가를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현혜경 제주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동북아시아 십자로라는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끊임없이 침입에 시달려야 했던 제주에서 민과 관이 하나가 되어 1000여 명의 왜구를 물리친 것은 제주역사에 길이 기념되어야 할 역사적 사건"이라며 "그러나 제주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잘 알지 못하는 제주의 숨겨진 역사 중의 하나가 바로 을묘왜변이어서 을묘왜변의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고 후손들에게 지역 역사 재인식의 계기가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이번 기획은 모두 10회에 걸쳐 연재된다. 을묘왜변 제주대첩은 왜 잊힌 역사가 되었나, 을묘왜변 제주대첩이 제주사회에 남긴 것들, 그날의 제주 사람들, 전남 영암 등지에서 이뤄지고 있는 전승 작업,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등을 도내외 취재를 통해 다룰 예정이다. 사건의 명칭은 '을묘왜변 제주대첩'으로 부르겠다. 을묘왜변이 전라도 남해안에서 발발해 최종적으로 제주에서 끝났고 제주의 승리로 귀결됐다는 점에서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 을묘왜변 연구에서 제주란 이름이 빠졌던 만큼 이젠 위상을 바로 찾아야 한다.

<이 기사는 제주연구원·제주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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