잦은 왜구 침입에 읍성·진성·환해장성 등 성곽 축조 잇따라 1555년 제주대첩 이후에 곽흘 목사 제주성 구조적 보완 확장 “허한 곳 불 비춘 듯 환히 보여”… 방어체계 정비 3읍성 9진성 [한라일보] 빼앗으려는 자, 수성하려는 자의 피땀이 밴 그날의 흔적들은 제주바다를 메운 땅 아래 잠들어 있다. 을묘왜변 제주대첩 전후에 증·개축이 이뤄지며 20세기 초까지 건재했던 제주읍성이 파괴되기 시작한 해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렇다. 김석익의 '탐라기년 부록'에는 일제 강점기인 병인(1926)년에 "제주성의 3면을 헐어 산지항을 쌓았다"고 적었다. 제주도는 오현단 부근 제주성 잔존 구간을 중심으로 1971년 8월 제주도기념물 '제주성지'를 지정했다. 이 섬을 지켰던 또 다른 방어시설인 진성과 환해장성 일부도 지방문화재가 됐다. 이로써 조선시대 성곽 유적들에 대한 보호 장치가 갖춰진 듯 하나 방어시설들의 입지적 조건은 오늘날 역설적으로 훼손을 앞당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제주대첩과 함께 기억해야 할 방어시설들을 따라가본다. ▶을묘년 이전부터 방어시설 강화 필요성 건의=개정증보 '제주어사전'(제주도, 2009)엔 '돌로 쌓은 성'을 일컫는 '성담'이란 어휘가 있다. 제주 전역에서 사용된 이 말은 외침에 대비해 섬 곳곳에 성곽들이 적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제이각 방면에서 바라본 제주도기념물 제주성지. 빼앗으려는 자, 지키려는 자들의 치열한 전투를 증거하는 곳이다. 이상국기자 홍기표의 '을묘왜변 제주 대첩의 재조명과 역사적 의의'(제주도연구, 2023)에 따르면 조선 건국 이래 제주대첩 시기까지 왜구가 제주를 침탈한 사례는 약 30회에 이른다. 태종 때까지는 곽지, 고내, 명월, 차귀 등 주로 북쪽 해안 일대였지만 세종부터 명종까지는 대정현, 천미포 등 남쪽까지 향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의 김의중 등이 상소를 올린다. "본주는 적침을 받을 요충 지역이 매우 많은데, 3읍에 방호(防護)하는 곳은 매우 적습니다. 목관(牧官) 동쪽에는 7∼8포(浦)가 있고, 서쪽에는 17포가 있고, 정의·대정에 각각 13포가 있어 대소의 포가 모두 방호소에 속하였습니다. 포소(浦所) 60여 곳에 방호는 9개소뿐이며, 군사는 강한 병졸이 없고 통솔하는 사람도 적격자가 아니기 때문에 방호의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없습니다." 1510년(중종 5) 7월 10일 중종실록 기사의 한 대목으로 김의중은 "왜구가 변방을 범하여 돌입한다면 참으로 염려된다"며 방호를 튼튼하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해양적 요충지인 제주 섬의 방비를 위한 관방시설의 필요성은 그보다 더 일찍 논의됐다. 1439년(세종 21)에는 제주도안무사 한승순이 장계를 통해 기존 9개소의 방호소만이 아니라 왜선이 정박할 가능성이 높은 21개소(북동쪽 15, 남동쪽 6)에도 군사를 배치해야 한다고 했다. 제주성은 1000여 명의 왜적과 맞서 싸운 제주대첩을 계기로 한층 확장된다. '탐라기년'에는 제주대첩 10여 년 뒤인 1566년(명종 21) 제주목사 곽흘이 "제주성 동성(東城)을 뒤로 물려 쌓았다"며 "처음에는 가락천과 산지천이 모두 성 밖에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해당 문헌에는 제주대첩 당시의 전투 상황을 "왜구의 적함이 높은 언덕에 자리 잡아 성 안을 진압하니 화살과 돌이 번갈아 떨어지고 군사 진영의 허한 곳과 실한 곳이며 병사들의 강하고 약한 곳이 불을 비춘 듯이 환하였다"고 묘사하며 제주성의 구조적 보완이 과제였음을 보여준다. 곽흘 목사는 2년 후인 1568년(선조 1)에는 제주성 장대(將臺)인 운주당을 완공했다. 제주대첩의 경험으로 유사시 제주성 전체 상황이 한눈에 들어오는 부지를 골라 누대를 세웠다. ▶해안 침입 지리적 여건상 읍성이나 진성 대부분=변성훈은 '제주도 지역 성곽 유산 연구 현황과 보존·정비 방향'(문화재, 2019)을 통해 "조선시대로 접어들어 중앙집권화의 일환으로 방어 체계가 강화되면서 성곽 축조와 증·개축 등의 정비가 시작되었다"며 "제주도에도 비슷한 시기에 성곽 정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결국 1678년(숙종 4)에 3개의 읍성과 9개의 진성 체제의 방어 체계가 마련됐다"고 했다. 1702년(숙종 28) 이형상 제주목사의 '탐라순력도'중 '한라장촉'에 그 같은 3읍 관아와 9개 진성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탐라순력도' 중 '한라장촉'. 3읍 관아와 9개 진성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제주도 제공 방호소 또는 수전소로 기록되고 있는 제주지역 진성 중 화북진성(화북진지, 이하 괄호 안은 문화재 명칭), 조천진성, 별방진성(별방진), 수산진성, 서귀진성(서귀진지), 명월진성(명월성지)은 제주도기념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애월진성은 제주도 향토유형유산이다. 반면 제주도 서남쪽 해안가를 방어하던 모슬진성은 흔적을 찾기 어렵고, 지금의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의 차귀진성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환해장성은 적선이 접안할 수 있는 해안선을 따라 쌓은 성으로 제주 삼별초에 의해 축조됐고 조선시대에 와서도 신축이 잇따랐다. 각기 다른 모양으로 해안가에 조성한 환해장성 중에서 10개소만 1998년 1월 제주도기념물로 지정됐다. 그간의 고고학 발굴 조사 활동을 토대로 '제주의 성담과 방어유적'(서귀포문화원, 2021)이란 제목의 단행본을 묶은 고재원은 "환해장성은 제주의 관방시설 가운데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것으로 확인될 뿐만 아니라 축조 또한 장기적으로 진행됐으며 제주도 해안 도처에 잔존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해안도로, 숙박시설 등 각종 난개발로 수난을 겪고 있는 환해장성에 대한 보호 대책이 시급하다고 했다. 진선희기자 <이 기사는 제주연구원·제주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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