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마을 이름이 이토록 뜻이 깊을 수 있을까? 오조리는 나 오(吾)에 비출 조(照)자다. 이 명칭으로 생각하면 마을에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떤 경우든 빛과 연관되어지게 된다. 수동적인 관점에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이 내게 비추는 것이 되며, 능동적인 입장에서 내가 비추는 빛이 세상을 밝게 하니 광명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설촌 시기에 참으로 대단하고 낭만적인 문장가가 있어서 마을 명칭을 이처럼 시어(詩語)에 가깝게 지었단 말인가! 설촌이 된 시점은 650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래는 성산고등하고 인근에 있던 마을이었는데 왜구의 침입이 많아서 남쪽으로 안으로 조금씩 옮겨서 취락을 형성하다보니 지금의 위치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다른 마을들에 비해 군진과 관련된 지명이 많은 것 또한 이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 시기에는 안가름에 의병들이 모여 군진을 치고 왜적과 싸웠다. 식산봉이라는 이름도 그 당시에 이 오름을 곡식이 쌓여져 있는 것처럼 위장해 군사 수가 엄청나게 많게 보인 기만전술을 펼치던 곳. 그래서 왜군들이 상륙을 못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그러한 역사적 전통이 있어서일까. 고기봉 이장은 1927년 5월 16일에 있었던 성산면 청년들의 씨름대회장에서의 항일 의거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민족적 자부심인 전통씨름 대회를 통해 청년의 기상을 높이려던 그 대회장에 일본 어선의 어부들이 대거 몰려와 행패를 부리자 거기에 격분한 청년들이 일본인들과 대규모 난투극 끝에 이들을 물리친 의거였다. 수많은 중상자와 일본어부 사망자가 2명에 이르는 사건. 100명에 가까운 성산 청년들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그 중 52명이 넘는 청년들이 1년 넘게 옥고를 치른다. 이 씨름 대회에서 심판을 봤던 분이 오조리 청년이었다는 것. 더욱 중요한 사실은 10년 뒤, 1937년에 다시 씨름대회을 열기 위하여 비밀리에 움직였다. 지하조직 지휘부에 일하던 오조리 청년이 일경에 연행되어 사망한 뒤, 시체도 없이 갈중이 만 가족에게 전해진다. 서글픈 현실은 항일의 방식으로 씨름대회를 준비하던 청년의 죽음과 옥고를 치른 분들에 대해 독립유공자의 예우를 하고 있지 못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유독, 섬 제주에서 있었던 지역적인 대규모 항일운동에 대해 심각한 차별에 분노를 느끼게 한다. 일경에게 연행 된 후, 시신도 없이 관에 옷 하나만 담아 장례식을 했다는 가족의 한 맺힌 사연. 가족사가 모여 민족사다. 과연 민족사란 무엇인가? 다양한 분야에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한다. 고기봉 이장 오조리의 가장 중요한 자원중의 하나는 전통적 마을 취락 구조가 대부분 그대로 보존 돼 있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집중적인 학술연구가 있어야 할 대목이다. 개발광풍 시기에도 마을 안길의 원형을 고집스럽게 그대로 유지한 관계로 얻게 된 소중한 자산으로 평가하고 싶은 것이다. 마을의 미래는 핵심적 과제 해결에 있다. 새마을운동 시기에 마을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공동체사업을 펼친 양어장이 공유수면이라는 이유로 국가소유가 되었다. 이를 오조리 주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기필코 돌려받아야 한다. 마을 주민들이 피땀흘려 만든 자산이요 오조리 후손들에게 물려줘야할 유산이니까. <시각예술가> 빛이 내게로 오는 밭에서 <수채화 79㎝×35㎝> 산과 바다 사이에 난 길 <수채화 79㎝×35㎝>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이 기사는 한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ihalla.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webmaster@ihall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