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화구를 굼부리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 [한라일보] 산굼부리라는 이름에서 드는 의문 두 번째는 굼부리의 뜻은 무엇인가이다. 제주어 사전은 굼부리는 '산 정상에 있는, 우묵하게 팬 곳'이라면서 분화구와 동의어라고 돼 있다. 그러니 산굼부리는 산+굼부리의 구성이라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이제 너무나 널리 유포되어 분화구를 가리키는 제주어가 마치 '굼부리'인 양 쓰이고 있다. 어떤 경우 이 굼부리가 '굼+부리'의 구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제 거의 습관화되어 거리낌 없이 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언어란 이렇게 분화해 나가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말에 들어있는 정확한 뜻을 길이 전달하고 소통이 원활하려면 가능한 한 원래의 뜻에 충실해야 한다. 소통이란 현재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일 수도 있지만, 과거, 현재, 미래 사이일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을 언어의 통시성이라고 한다. 이 특성은 언어가 가지고 있는 매우 중요한 기능이다. 언어가 거쳐온 길을 밝힐 때도 이런 통시성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편 제주어 사전에는 굼기라는 표제어가 올라 있다. 고망이라고도 한다고 한다. 고망이나 굼기나 같은 뜻이라는 것인데 이 말들은 국어로는 구멍의 뜻이다. 내용을 보면 구녁, 구멍, 굼기, 궁기라고도 하는데, 고어 구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산굼부리 분화구 바닥, '굼'이란 구멍 혹은 구덩이를 의미하는 제주어. (위키피디아 제공) 움푹한 지형이 많은 구마모토는 '굼+모토'라는 뜻. (위키피디아 제공) 산 정상에 우묵하게 팬 곳이란 '굼' 혹은 '구무' 중세어에는 구멍, 구메, 구모, 구무, 굼긔 같은 말들이 나온다. 1601년 허준이 저술한 천연두 전문 한글 의학서적인 '언해두창집요'라는 고전에 나오는 '죠고만 구멍을 듧고' 처럼 오늘날 쓰고 있는 구멍이라는 어휘는 오래전부터 쓰였다. '청구영언'에 실린 '창 밧게 가마솟'이라는 고시조에는 '이별 나는 구메도 막히ᄂᆞᆫ가'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구메도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 '구급간이방언해'에 '왼녁 곳구모', '지장경언해'에 '터럭 구모마다 ᄌᆞ몯 광명을 폐샤 삼쳔 대쳔 셰계ᄅᆞᆯ 비최시니'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구모도 같은 뜻으로 썼다. '석보상절'에 '여래ㅅ 모매 터럭 구무마다 방광ᄒᆞ샤', 월인석보에 '내 모미 하 커 수물 굼기 업서'에서처럼 구무가 구멍의 뜻으로 쓰였다. 굼긔와 굼기는 '구멍에'라는 뜻으로 쓰였고, 이의 독립형은 구무다. 오늘날의 구멍이란 뚫어지거나 파낸 자리를 지시한다. '굼'에 '엉'이라는 어형보강소가 붙은 말이다. 구멍이란 결국 구무 혹은 굼에 소급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굼+부리의 굼은 구멍의 제주어다. 따라서 제주어 사전에 나오는 굼부리를 '산 정상에 있는, 우묵하게 팬 곳'이라면서 분화구와 동의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이 말은 굼부리에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굼' 혹은 '구무'에 해당하는 풀이다. 알타이어계 여러 언어에서도 이 말은 거의 유사하게 쓰인다. 퉁구스어에서 '굼-', 몽골어 '괴뮉, 일본어에서 구마가 어근으로 나타난다. 모두 구멍(cavity) 혹은 구덩이(hole)를 지시한다. 일본 큐슈의 구마모토(熊本)는 1599년 일본 센코쿠 시대의 무장이며 히고국이라고 하는 오늘날 규슈 구마모토현의 다이묘인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구마모토로 고친 지명이다. 그 뜻에 대해 '고마(혼잡한 지형)+모토(본거지)'로 보아 뒤엉킨 지형의 중앙 땅이라는 뜻이라는 설이 있고, '곰(고구려)+모토(본거지)'로 보아 도래인들의 본거지라는 뜻이 있다. 두 번째 설은 상당히 매력적이긴 하지만 쿠마키(熊木), 쿠마게(熊毛), 쿠마노(熊野) 등 구마가 들어있는 지명들이 한결같이 혈거족의 근거지였다는 점에서 설명이 곤란한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일본어에서도 '고마' 혹은 '구마'는 '굼부리'가 아니라 '굼'에 대응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굼부리'가 분화구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은 굼부리 뒤에 붙은 '부리'의 어원을 알면 더욱 또렷해질 것이다. 비교적 높은 빈도로 접하는 옛 지명의 하나가 '부리'다. 우선 오늘날 쓰고 있는 부리의 사전적 의미를 보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첫째 새나 일부 짐승의 주둥이를 지시한다. 길고 뾰족하며 보통 뿔의 재질과 같은 딱딱한 물질로 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둘째는 끝이 뾰족한 부분을 말한다. 예를 들면 소매의 부리 같은 것이다. 셋째는 병과 같이 속이 비고 한끝이 막혀 있는 물건에서 가느다라며 터진 다른 한끝 부분을 이르는 말로 쓴다. 이런 설명만으로는 뭔가 석연찮다. 또 다른 미스터리, 산굼부리의 ‘부리’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전문가) 백제 지명에 부리(夫里)가 나온다. 모량부리현, 반내부리현, 고사부리현, 고량부리현 등이다. 이 한자표기는 이두식 표기이므로 뜻글자로서의 의미는 없다. 이 부리에 대응하는 마한의 지명에 비리(卑離)가 있다. 위서 동이전에는 마한 소국의 이름에 내비리국, 벽비리국, 여래비리국 등이 나온다. 이 부리니 비리니 하는 옛 지명에 나오는 말들은 평원 혹은 평야에서 부락이라는 뜻의 지명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도 우리 말에는 '~벌'이라는 말을 쓴다. 황산벌, 달구벌 하는 식이다. 제주어에서는 'ᄇᆞᆫᄇᆞᆫ하다'라는 말이 있다. '벵듸'라는 제주어는 '평평한 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산굼부리라는 지명을 표기하면서 이같이 부리(夫里)라는 글자를 사용하는 것을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을 위에서 보는 것처럼 평야나 평원 아니면 부락의 뜻으로 썼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산굼부리가 낮은 산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평야라고 하기엔 부적절한 지형이기 때문이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전문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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