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고내봉 동쪽, 섬 제주에서 가장 큰 연못이 있다. 3000평에 달하는 너른 연못을 중심으로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수 백년 된 아름드리 고목 수십 그루가 곳곳에 유서 깊은 마을임을 증명하고 있었고 초가집들 속에서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마을. 하가리라고 하는 마을 명칭의 연원이 참으로 특이하다. 제주어 고유지명인 더럭이라는 용어를 한문으로 음차와 훈차하여 '더'를 '加'로 '럭'을 '樂'으로 표기하여 원 지배 시기 탐라총관부 현촌의 위상을 가졌던 고내현의 내륙 지대를 고작 명의 제후국 조선 태종 때(1418년) 분리하여 하나의 마을로 정하면서 가락리(加樂里)라고 하였다. 세종 때에 규모와 위상이 큰 이 마을 윗동네를 상가락, 알동네를 하가락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니 하가락이 정조 22년(1798년)에 하가리로 바뀌었다. 장봉길 이장 발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도 마을 곳곳을 이르는 고유지명들이 참으로 정겨운 제주어의 본질을 느끼게 한다. 우당빌레, 득근이왓, 주승굴, 무르세기, 돔박생이, 사리왓, 잣질 등 조상 대대로 삶을 영위하며 지칭하던 공간 명칭들이다. 토양이 좋아서 소출량이 여타 마을에 비해 월등하게 높았다. 마을 어르신들이 일러주시는 바에 의하면 보리농사를 주로 하던 시기에는 북제주 1등 토지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따라다녔다고 한다. 탐라국 시기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마을의 역사성 뒤에는 농업생산성이라고 하는 경제적 배경이 견고한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농업 여건은 선비들을 키워낼 수 있는 뒷받침이 될 수 있었을 터. 마을공동체 정신에 기반을 둔 학문숭상의 문화가 뿌리 깊게 내려진 마을이다. 장봉길 이장은 하가리의 가장 큰 자긍심으로 당연하게 "인재를 키워내야 한다는 마을공동체의 사명감"이라고 밝혔다.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일러주는 사연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출향인사들의 학창시절 모습이 보인다. 제주시나 육지, 또는 해외에 유학을 간 자녀를 위하여 학비를 보내는 일이 살아가는 이유였으며, 학자금을 보내기 위하여 밭을 파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 한 마리 가격이 밭 1500평 정도였던 시절, 밭을 몇 개 팔아서라도 대학교육을 시키려 했던 그 마음들이 있었기에 아들, 딸들이 세상에 공헌하는 힘이 되었음을 강조하신다. 재산보다 사람의 미래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던 가치판단의 터전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한 문화가 깊게 느껴지는 미담이 있다. 1953년도 더럭국민학교 학교대장에는 학교 부지 1948평을 단기4279년(1946년)에 장경학 외 1인으로부터 기부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름다운 학교로 유명한 더럭초등학교가 설립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재산을 흔쾌하게 내놓을 수 있었던 고마움과 교육의 중요성을 마을의 역사 속에서 일궈온 소산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가리의 중요한 장점은 교통이 편하다는 것이다. 마을 위 아래로 동서로 뻗은 중도로가 지나고 있으니 자동차문화 시대에 농업경관 속 다세대 주택에 살며 직장생활 및 자녀교육을 할 수 있는 풍부한 여건이 마련된 마을로 발전을 거듭하는 과정에 있다. 자연 속에서 사람의 가치를 키워왔고 키워나가는 마을. 아름다운 마을 돌담들이 그 정성스러운 '사람의 길'을 이어가게 한다. <시각예술가> 팽나무 그늘쉼터와 주변풍경 <수채화 79㎝×35㎝> 대문 있는 초가, 문귀인 가옥 <수채화 79㎝×35㎝>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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