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밀의 언덕'. [한라일보] 솔직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 글을 쓸 때가 있다. 그런데 말로 다 하기 어려운 말들을 쓰다 보면 이상하게 솔직함과 거리가 멀어지곤 한다. 누군가에게 닿을 글이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 더 예쁜 단어를 찾고 싶고 근사한 문장을 만들고 싶어진다. 그저 담백하게 마음을 전하고 싶어 시작한 글은 종종 멋 부린 포장으로 치장된, 거짓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마음도 아닌 글로 마무리되곤 한다. 솔직함을 쓰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 느끼하게 선언하고 과장되게 부풀려진 글을 볼 때마다 이걸 왜 썼을까 하는 자책에 빠지기도 하고 의도와는 다르지만 아름답게 치장된 모양새가 타인에게 칭찬받을 때는 순도 낮은 기쁨에 잠시 들뜨기도 한다. 영화 '비밀의 언덕'은 글짓기에 재능이 있는 12살 명은의 이야기다. 단란한 4인 가족,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소녀, 소녀가 자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다정한 선생님, 낯설었지만 금세 가까워지는 단짝 친구들까지 마음을 무르게 만드는 1996년의 공간과 사람들이 영화 '비밀의 언덕'에 아름답게 담겨 있다. 하지만 영화는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다. 톡 쏘는 탄산처럼 새콤하기도 하고 얼결에 베어 문 고추처럼 알싸하기도 하다. 그건 이 영화가 결코 하나의 감정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언덕을 쉼 없이 오르내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오름과 내림 사이, 감정과 감각의 기복 사이 발견한 오색찬란한 시절의 맛들이 이 영화에 스며들어 있다.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5학년 명은은 가족과 학교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다. 임원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용기를 내어 반장이 되었고 글짓기에 재능을 발견한 뒤 부단한 노력을 해서 연이은 수상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사는 명은을 대하는 가족과 학교의 온도 차가 다르다. 시장에서 젓갈을 파는 엄마와 백수에 가까운 아빠는 명은이 반장이 되어도, 글짓기 대회에서 수상을 해와도 명은의 기대만큼 기뻐하지 않는 것 같다. '반장보다 바쁜 게 반장 엄마'라는 명은 엄마 경희의 말이나, '우수상이 아니라 최우수상을 타야지'라고 말하는 명은 아빠 성호의 말에 들뜬 명은은 금세 시무룩해진다. 게다가 나를 둘러싼 것들이 나를 설명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명은에게 호통을 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데 무심하며 무직에 가까운 아빠나 시장에서 멋도 부리지 않고 일만 하는 데다 쓰레기도 아무렇게나 버리는 엄마는 친구들에게 턱 하고 꺼내 놓을 자랑 거리로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 가족 다 맘에 들지 않고 내가 제일 잘 나가 상태에 빠져버린 명은은 자신의 진짜 마음도 모르게 거짓말을 시작한다. 그리고 명은의 거짓말은 꺼내 놓을 수 없는 비밀들을 만들고 그 비밀들은 명은의 하루하루를 숨 가쁘게 만든다. 또한 '비밀의 언덕'은 쓰는 마음에 대한 섬세한 관찰기이기도 하다. 솔직함을 쓰는 일, 내가 쓴 글이 타인에게 주는 영향들 그리고 글의 완성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할 쓰는 마음을 다독이는 시간들을 영화는 사려 깊게 담아낸다. 마치 여러 번 퇴고한 글처럼 야무진 정성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자신의 언덕을 오른 명은은 망설이지 않고 스스로의 마음이 가는 선택을 한다. 누군가에게 쓴 글을 그 누군가의 앞에 정확하게 내미는 명은을 보며 고되고 어려웠을 마음의 언덕을 홀로 오른 이 소녀가 앞으로 써 내려갈 마음들이 얼마나 높고 환한 곳에 닿을지 상상하게 되었다. 마음의 언덕에서 배운 것들은 늘 당장 써먹을 수 있지는 않다. 하지만 누군가가 마음 안에 귀하게 간직한 것들은 언제든 반짝이기 마련이다. 그 빛은 나에게 솔직하고 누구보다 화려한 오직 자신만의 것이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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