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제주출신 해녀 8명 남아 여전히 물질하며 생계 이어가 과거 독도 당일치기 전복작업 고향생각에 밤마다 눈물 흘려 "기회되면 독도서 물질 하고파" [한라일보] 1940년대부터 1970년까지 울릉도는 독도 해녀들의 전초기지 역할을 해왔다. 특히 1950년대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이 미역 등 수산물 채취를 위해 해녀 수십명을 모집해 독도에서 조업을 벌였다는 기록도 남아있는데, 당시 울릉도에는 50여명이 넘는 제주해녀가 머물며 독도와 울릉도 등지에서 물질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울릉도 지역의 어촌계에서 잠수기어선을 동원해 해산물을 채취하게 되면서 해녀의 필요성이 점점 사라지게 됐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독도해녀는 없고 울릉도 해녀만 남게 됐다. 울릉도 도동항 전경. 사진=독도해녀특별취재팀 제주 출신 울릉도 해녀들. 사진 왼쪽부터 김복선, 윤춘자, 김수자 해녀. 사진=독도해녀특별취재팀 이들이 울릉도에서 물질을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였다. 당시 울릉도 내 해안 곳곳에서는 제주해녀들이 물질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집계는 되지 않지만 대략 50~6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이 울릉도에서 물질을 시작했을 당시 울릉도 1세대 제주출신 해녀 선배들이 터전을 이룬터라 울릉도에서의 물질 여건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고향인 제주를 떠나 타지에서의 생활은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다. 울릉도 공항이 들어설 가두봉 전경. 사진=독도해녀특별취재팀 김수자 해녀는 1972년 고향인 제주를 떠나 울릉도에서 물질을 시작했다. 그는 50여년 전 바다에서 울릉도를 처음 마주한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 해녀는 "해가 저문 밤 늦은 시간에 배를 타고 울릉도 도동항 인근에 도착했는데, 도동항을 둘러싼 봉우리에는 안개가 자욱했지만 마을 안의 하늘에는 별이 떠있어 참 신비한 섬이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김 해녀는 "울릉도에서 생활을 시작했지만 오후 8시만 되면 섬속에 모든 불빛이 사라졌다"면서 "밤이 되면 어두캄캄한 곳에서 생활하기가 두렵기도 했고 눈을 감으면 고향 생각이 나서 밤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울릉도 삼선암 전경. 사진=독도해녀특별취재팀 2세대 해녀들도 선주를 따라 독도에서 당일치기로 전복 씨를 뿌리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앞서 독도에서 물질을 했던 선배 해녀들은 독도에서 3~4일 숙식까지 하며 미역을 캐기도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독도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는 하나둘씩 사라졌다. 크루즈 여객선 등이 접안하는 사동항 전경. 사진=독도해녀특별취재팀 울릉도에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해녀들은 기회가 된다면 지금도 독도에서 물질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 김수자 해녀가 사는 집. 사진=독도해녀특별취재팀 특별취재팀=이태윤 정치부차장·강다혜기자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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