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편집자로 일했던 신수진 씨는 제주에서 많은 사람들과 그림책을 만들면서 서울에 있을 땐 듣지 못했던 목소리를 발견하고 있다고 했다. 신비비안나 기자

기적의도서관 개관 준비하며 제주와 인연
'그림책갤러리 제라진' 통해 창작 교육도
"이전에 듣지 못했던 목소리 계속 발견해…
제주서의 삶, 점선 잇기 하듯 나를 더 확장"


[한라일보] "전 제주에서 '점선 잇기'를 하는 기분이에요. 수많은 사람들과 그림책을 만들면서, 서울에 살았더라면 듣지 못했을 목소리를 계속 발견하고 있죠. 그러면서 제가 알지 못하는 어떤 형태를 만들어가는 느낌이에요."

인터뷰 끝에 신수진(52) 씨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림책'으로 제주, 그리고 사람과 연결돼 온 그의 10여 년간의 이야기를 요약해 들려주는 듯했다. 수진 씨는 제주에서 "내가 나를 더 확장해 나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시민들과 함께 그림책 만들기

그림책을 만드는 일은 그의 직업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며 출판사에 들어갔고, 1998년쯤부터 하고 싶던 '어린이 책'을 맡게 됐다. 어린이를 위한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림책'이라고 부를 만한 책이 거의 없었다. 삽화는 보조만 할 뿐 글자가 많은 동화책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책 시장에 그는 '저학년 동화', '그림책'을 선보였다. 수진 씨는 "더 어린 아이들도 볼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어 비슷한 고민을 하는 편집자와 합심해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를 발굴해 냈다"면서 "어린이 책의 장르를 넓혀가는 일이 상당히 보람됐다"고 말했다.



20년 가까이 출판사 편집자 경력을 쌓아온 그가 삶의 공간을 서울에서 제주로 바꿨을 때 대개는 '출판사를 차리려나 보다' 했단다. 수진 씨는 "책을 계속 만들고 싶었다"면서도 "사장이 되긴 싫었다"고 웃었다. 분명하지 않았지만 다른 길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몇 해 전 제주에서의 경험이 어떤 믿음을 갖게 했다. '책을 읽자'는 바람을 타고 제주에 기적의도서관 2곳이 문을 연 2004년, 개관 전시 기획에 참여했던 때였다.

"'전시에 영상이 필요하다', '장식장을 만들어야 한다' 하면 그걸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연결되더라고요. 대가를 흥정하거나 하지 않고 기꺼이 도와야지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요. 제주의 어린이를 위해 도내 문화 활동가들이 다 모인 것 같았어요. 그때 어렴풋이 나중에 이런 곳에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어린이 도서관이라는 '공적 이익'을 위해 모인 사람들과의 만남은 인상 깊었다. 그가 2012년 제주에 내려오면서 "문화적인 영역, 공공의 영역에서 내 역할이 있지 않을까" 했던 것도 그래서다.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제주가 '그림책 창작 워크숍'으로 완성된 그림책을 엮어 발간한 책자. 신비비안나 기자

"일단 신나게 놀자"고 했지만 이주 첫해에 금세 또 다른 점이 연결됐다.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 제주'와의 만남이었다. 제주에서 어린이책과 관련된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그림책 전문 미술관을 만들어 보자는 꿈을 품고 꾸린 모임이었다. 수진 씨도 영입되듯 그 '실험'에 함께하게 됐다. 2014년 제주시 원도심에 '그림책갤러리 제라진'을 열었다.

지난해까지 운영된 이 공간에선 쉬지 않고 그림책 전시가 이어졌다. 작가 초청 강연, 드로잉 수업도 진행됐다. 그 중에서도 '그림책 창작 워크숍'은 호응이 컸다. 수진 씨의 설명처럼 "평범한 시민들이 자기 이야기를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려 각자의 그림책을 만드는 수업"은 거의 4달을 집중해야 한다는 부담에도 매번 모집 인원을 금방 채웠다. 수진 씨는 "전문 편집자이니 얼마나 잔소리를 했겠느냐"면서 "취미 활동이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힘들었을 텐데도 다들 재밌게 작업했다"고 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그림책은 '시민 작가' 수만큼의 이야기를 담았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고단함부터 제주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발달장애인인 아이를 위해 만들어주고 싶은 세상에 대한 바람까지 모두 한 편의 이야기가 됐다. 그리고 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그림책으로 묶였다.

수진 씨가 지난해까지 '그림책갤러리 제라진'에서 이어졌던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신비비안나 기자

|경험 담은 그림책으로 공감 기회를

그림책갤러리 제라진은 올해 문을 닫았지만 모임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예전처럼 정해진 공간이 없어도 그림책으로 경험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창작을 이어 간다. 최근에는 반려동물을 떠나보냈던 이들이 '무지개 다리 안내소'라는 이름으로 모여 그림책을 만들고 있다. 자신을 '그림책시민교육활동가'라고 소개하는 수진 씨는 이들이 그림책으로 목소리를 내고 그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우리의 목적은 그럴 듯한 책을 내서 작가가 되거나 판매를 많이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일단 표현하겠다는 것은 내 목소리, 내 경험이 묻히지 않고 의미 있는 발화가 되길 원하는 거 잖아요. 그러니 각자의 경험을 직접 쓰고 그려서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책 형태로 만드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죠. 지금은 상업 출판에는 관심이 없어요. 좋은 책을 만들어서 많이 팔아야지 하는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출판해 지역에 발표하고 공감하는 기회를 만드는 게 재밌어요.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자신을 '그림책시민교육활동가'라고 소개하는 수진 씨는 사람들이 그림책으로 목소리를 내고 그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신비비안나 기자

수진 씨가 제주에서 점을 이으며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데에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좋은 사람들"이 함께한다.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울려 살길 바라는 '별난고양이꿈밭 사회적협동조합' 연구원 역할을 하게 된 것도 장애 이해 교육을 위한 정보 그림책을 만든 양육자들이 연결점이 됐다. 제주에서 생각지 않던 대학원 공부를 하며 아동·청소년이 행복한 사회를 고민하는 것도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새로운 일로 이어지는 지점이 되고 있다.

"저는 제주가 아동과 청소년, 장애인이 살기 좋고 행복한 곳이 됐으면 좋겠어요.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공간,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협업할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을 계속 찾고 싶어요. 그렇게 다양한 사람과 만나면서 목소리가 드러나지 않는 존재들을 발견하고, 거창하진 않지만 그 목소리를 이렇게 조그마한 책자들로 쌓아가면서 전하고 싶고요. 앞으로 또 누굴 만나서 뭘 할지 정해진 것은 없지만 여전히 기대되고 설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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