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까지 존속하다 폐촌 길게 이어진 올레·집터 등 당시 화전 마을 모습 간직 옛길, 소통로이자 역사의 길 조사·활용방안 마련 나서야 [한라일보] 1940년대 폐촌돼 지금은 잊혀진 화전 마을 터가 80여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6월 22일과 7월 28일 취재팀은 두 차례에 걸쳐 서귀포시 미악산 서북쪽 일대(동홍동 산 27번지 일대) 탐사에 나서 '연저골'로 불린 화전 마을 터를 확인했다. 이곳에서는 길게 이어진 올레와 집터, 집담, 밭담 등이 당시 마을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올레는 길이 40m, 폭 1.8~2m, 담장 높이는 1m 안팎으로 집터까지 곧장 연결돼 있다. 올렛담은 자연석을 쌓은 형태로 일부 허물어졌으나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올레 뒤쪽으로는 집터와 대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다. 주변으로는 집터로 추정되는 5~6곳이 확인된다. 눈길을 끄는 것은 길이 약 80m 정도 되는 올레를 따라 집터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집터 주변으로는 화전을 했던 농경지가 있고 산담을 정성스레 조성한 커다란 분묘 3기가 자리하고 있다. 집담은 미끈한 하천석과 자연석을 촘촘히 쌓아올렸다. 옛 화전 마을인 연저골에는 올레와 집터, 옛길 등이 잘 남아 있다. 취재팀이 마을을 이어주던 옛길을 조사하는 모습. 특별취재팀 소하천과 집터 사이로는 폭 3~4m의 옛길이 길게 나 있다. 옛길은 법정사 방향으로, 반대편은 5·16도로변 한라산둘레길 인근으로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 화전 마을간 왕래와 교류가 이어졌다. 강제검 난(1862년), 방성칠 난(1891년) 등 구한말 잇따른 제주민란 당시에도 이 길을 통해 다급한 소식이 전해지고, 화전 마을 사람들은 거사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옛길은 화전 마을과 마을, 주민들을 잇던 소통의 길이자 역사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연저골은 이곳 지형이 제비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燕卵)이라는데서 왔다고 한다. '연제골','연자골'이라고도 불렀다. 연저골은 1942년쯤 마지막 남아있던 주민이 떠난 후 잊혀진 마을이 됐다. 연저골의 마지막 주민은 강 할머니다. 연저골에 남아있는 집터 강 할머니 가족이 연저골에 살기 시작한 때는 강 할머니의 증조할아버지 자식 중 막내 할아버지가 제주시 애월읍 장전에서 이주하면서부터다. 연저골이 한창일 때는 18가구 정도 살았다. 강 할머니 가족처럼 대부분 화전과 숙전(熟田)을 병경작(倂耕作)하는 겸(兼) 화전민이었다. 집들은 대부분 삼 칸 초가집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큰방(안쪽에 고팡), 마루, 작은방(작은방 안쪽에 부엌)으로 이루어졌다. 마당은 200~300평 정도로 넓은 편이었다. 산전이나 '멀왓'에서 수확한 곡물들을 마당에서 건조하고 탈곡해야 했기 때문이다. 현재 연저골 집터에서도 너른 마당이 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생활용수를 얻었던 소하천을 취재팀이 살펴보고 있다 연저골에서 재배한 작물은 주로 보리, 조(주로 맛시리), 피, 메밀, 감자 등이었다. 이외에 감저(고구마), 토란, 양애(양하), 산마 등이 생산되어 생활에 큰 불편이 없었다. 무, 배추, 참깨 등은 오히려 아랫마을보다 수확이 많았다고 한다. 강 할머니 밭에서는 보통 일 년에 메밀 서른 섬을 수확했다. 그래서인지 마을 인심이 후한 편이었다. 옛 모습 거의 그대로 남아있는 올레 연저골 사람들은 농사 외에도 '테우리'일을 겸했다. 아랫마을에서 소나 말을 올리면 미악산(솔오름) 근처에서 이 마소를 돌보는 일을 했다. 농번기가 끝난 뒤에는 숯을 구웠다. 숯 굽기는 여러 사람이 한 번에 숯(백탄)을 구웠다. 화전 마을에선 해안 마을과는 달리 여건상 제사상에 올리는 생선을 장만하기 어렵다. 그때는 대신 나무를 생선 모양으로 다듬어 만든 목어(木魚)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강 할머니의 아버지는 제사 한 달 전쯤 미리 해안 마을가서 솔라니(옥돔) 한 마리 사다가 '새'(띠)로 만든 도구에 소금 간 많이 한 뒤 종이에 싸서 안방 위에 매달아 두었다가 제사 때 썼다. 저녁에는'솔칵(관솔,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 가지나 옹이), 호롱불, '각지불'을 켜고 살았다. 화전 마을에서도 교육열은 높았다. 강 할머니 남동생은 6살 때부터 아버지가 모는 말을 타고 서귀포시 1호 광장에 있는 서당에 글을 배우러 다녔다. 강 할머니는 서당에 가는 대신 물로 연필 적셔가며 동생 어깨너머로 천자문을 습득했다. 진 박사는 "제주4·3 때문에 잃어버린 마을이 된 다른 화전 마을과 달리 연저골은 1942년 강 할머니 가족이 동홍동으로 내려오면서 사실상 폐촌되었다. 일제 강점기 제주도민 ¼ 정도가 일본으로 돈 벌러 갔는데, 이로 인해 생겨난 도내 노동력 공백을 화전민들이 메꾸었다. 더는 힘든 화전 농사를 짓지 않아도 제주도 농촌에 경제활동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화전민들이 해안 마을로 내려가게 된 것"이라고 했다. 제주의 화전 마을은 4·3사건 당시 사람들이 떠나면서 잃어버린 마을이 된 경우가 많다. 이와 달리 연저골 주민들이 마을을 떠난 데는 이런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연저골은 화전 마을의 흔적을 잘 보여주는 소중한 유산이다. 올레와 집터 등이 더 이상 멸실되기 전에 실태조사 등이 이뤄져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제주의 화전 마을과 주민들의 생활상을 조명하고, 활용방안을 고민해 나가야 한다. 특별취재팀=이윤형 편집국장·백금탁 제2사회부장 자문=진관훈 박사·오승목 영상전문가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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