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대첩 조명 작업 연계 표지석·기념비 등 설치 잇따라 역사문화 단체 답사·제주성 투어·걷기 코스도 운영 꾸준 흩어진 역사 자원들 묶고 잇는 등 공감대 확산 노력 필요 [한라일보] 제주시 동문시장 공영주차장 방면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차량들을 지나 언덕배기에 오르면 도심 안에 자리 잡은 공원 하나가 보인다. 2022년 조성된 운주당지구(運籌堂地區) 역사공원이다. 원도심의 높다란 건물들 사이로 제주 바다가 눈에 들어오는 제주시 일도1동 1108번지 운주당지구에 '을묘왜변 제주대첩' 빗돌이 있다. 제주대첩의 역사적 의미를 드러내는 논의가 잇따르면서 지난해 말 제주도 명의로 제작한 것이다. 제주성을 무너뜨리고 이 섬을 손 안에 넣기 위한 왜구들의 배가 도착했던 화북포구에 표지석이 있다면 운주당지구엔 기념비가 놓였다. 제주대첩에 얽힌 이야기를 품은 곳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그날의 기억들을 전하기 위한 활동들이 늘고 있는 만큼 이것들을 한데 묶고 이으며 제주사회로 퍼뜨리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제주시 일도1동에 조성된 운주당지구 역사공원. '제주성 군사지휘소'였던 운주당 터에 만든 공원으로 원도심이 내려다보인다. 이상국기자 운주당지구에 있는 기념비의 전문이다. 운주당은 1555년 제주대첩을 겪은 10여 년 후인 1568년(선조 1)에 제주목사 곽흘이 왜적의 침입이나 피해를 막기 위해 제주성안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만들었다. 2015년과 2017년 지금의 운주당지구에 대한 두 차례의 발굴조사에서는 성문거교군(城門擧橋軍)이 근무했던 수성소(守成所)가 적힌 명문기와 등이 출토됐다. 2019년 10월 제주도는 운주당지구를 향토유형유산으로 지정했다. 운주당지구에 제주도가 세운 을묘왜변 제주대첩 기념비. 지난해 운주당지구 역사공원 준공으로 원도심을 걸으며 제주대첩을 새길 수 있는 공간 하나가 더 늘어났다. 제주목 관아에서 운주당 터까지, 거기에 또 다른 역사 현장인 화북포까지 닿으면 그 영역이 더 넓어진다. 제주 전역에 걸쳐 답사를 진행하며 이 섬의 역사·문화 자원을 발굴·기록해온 사단법인 질토래비는 제주대첩의 길을 두 발로 딛고 제주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수년째 펼쳐오고 있다. 창립 5주년을 기념해 지난달 500여 쪽의 두툼한 분량으로 펴낸 첫 번째 총서 '질토래비, 제주 역사문화의 길을 열다'에 그 여정이 고스란히 실렸다. 그중 '동성·돌하르방 길'로 묶은 앞장에 문영택 이사장 등 질토래비 답사팀이 을묘왜변의 흔적을 좇아 걸어다녔던 장소들이 등장한다. 제주대첩 당시의 제주목사였던 김수문이 건립했던 제주목 관아 망경루, 왜적에 맞서기 위해 축조했던 제이각과 주변 골목길의 제주대첩 벽화, 운주당지구 역사공원, 화북포로 향하는 큰길인 동문한질 등으로 이어지는 걸음 속에 질토래비는 "도외 정부군의 도움 없이 제주선인의 자체적인 힘으로 왜구를 물리쳤다는 점에서, 제주 을묘왜변과 주요 인물에 대한 조형물 구축과 홍보 등은 구국의 사례로 확산되어야 할 것"이라는 바람을 전했다. 제주도가 운영하는 '해설이 있는 제주성 투어' 장소 중 한 곳인 제이각. 망경루가 있는 제주목 관아 앞에서는 수문장 교대 의식과 연계해 김수문 목사와 결사대 등 제주대첩 전투 장면을 짤막한 공연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제주목 관아 야간 개장 사전 행사로 기획돼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6시부터 시작된다. 제주성의 흔적을 중심으로 거리 위에 제주대첩의 사연들이 흐르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알리고 공감대를 넓히려는 노력이 더 필요해 보인다. 원도심에 흩어진 제주대첩 빗돌들 앞을 거쳐가는 이들이 한 번쯤 그날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말이다. 제주를 대표하는 박물관인 국립제주박물관 상설전시실은 그런 점에서 아쉽다. 이곳의 '제주 역사 연표' 코너에는 을묘왜변 제주대첩이 기록되지 않았다. 16세기 제주를 정리한 연표를 보면 ▷1510년 명월진성, 별방진성 축조 ▷1552년 천미포왜란 ▷1554년 남치근, 천미포에서 왜구 격퇴 ▷1581년 애월진성 축조 ▷1590년 서귀진성 이축, 조천진성 중창 순으로 역사상 주요 사건을 배열했지만 1555년 을묘왜변은 찾아볼 수 없다. 제주 역사 연표 인근 '왜구의 침입, 제주의 방어체제' 자료에서 제주목사가 강력한 군사 권한을 가지고 9개의 방어진성, 25개의 봉수, 38개의 연대를 설치하는 등 방어체제를 정비해 나갔다는 대목이 적혔지만 그것의 계기가 된 사건 중 하나인 을묘왜변 제주대첩은 빠져 있다. <이 기사는 제주연구원·제주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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