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라' [한라일보] 국어사전에는 '필사'의 여러 가지 뜻이 있다. 먼저 '베끼어 씀'이라는 명사가 있고 두 번째로는 '죽을 힘을 다한다'는 명사가 있다. 이밖에도 필사는 '붓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 또한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필사적이라고 할 때는 두 번째 필사의 뜻을 쓴다. 흥미로운 것은 이 필사의 두 번째 뜻에는 '죽을 힘을 다한다'는 뜻 이외에도 '살 가망이 없다'는 뜻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살리려고 할 때 그러니까 가망이 없다는 고갯짓에 저항할 때 필사는 기적처럼 완성되기 마련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수라'는 더 이상 '가망 없음'이라고 등을 돌리는 이들의 틈으로 솟아난 카메라가 필사적으로 기록한 귀중한 시간들을 담고 있다.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사라져 버린 아름다운 갯벌의 굴곡 많은 역사를 기록한 이 영화의 제목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마지막 갯벌 '수라'의 이름이기도 하다. '어느날 그 길에서', '잡식동물의 딜레마' 등의 작품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일들 중 특히 동물권에 관심을 보여온 황윤 감독의 신작인 '수라'는 환경 영화인 동시에 성장 영화이고 어떤 순간에는 공포 영화이기도 하다. 갯벌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동물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들을 포착한 이 영화의 카메라는 마치 만든 이가 손에 꽉 쥐고 놓지 않는 붓처럼 느껴진다. 말 그대로의 절경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 그 풍경을 채우던 생명체들이 얼마나 큰 고난에 처하는지 그리고 그 자연 앞에서 인간은 어떤 감정과 태도를 취하고 살아갈 수 있는지를 영화는 필사적으로 스크린으로 옮겨낸다. '수라'는 많은 순간 분노를 자아내는 영화다. 인간이란 얼마나 이기적인 종인지, 그중에서도 특히 더 이기적인 인간들이 세상을 얼마나 빠르게 망칠 수 있는지를 보고 있자면 참담하기 그지없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입가에 맴돌던 말은 '도대체 얼마나 더 잘 살려고'였다. 이유야 만들면 있는 것이고 남의 상처야 보지 않으면 그만인 것인 데다 사람이 아닌 생명체의 삶이란 그야말로 안중에 없는 이들의 삶. 권력이 쥐어진 손이, 결정을 내리는 순간이 어찌나 무의미한 지 탄식조차 들지 않았다. 반면에 이 한 줌의 어처구니없음과 대비되는 '수라' 속 대자연의 삶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환멸의 감정이 무너뜨릴 수 없는 경이로운 생의 감각들이 영화 속에 담긴 세월에 너무나 선명했다. 우리는 지금 살아 있다는 동사로 가득한 카메라의 필사 노트에는 누구도 매립할 수 없는 생명의 강인함과 위대함이 차고 넘쳤다. 마치 가두거나 막을 수 없는 바다의 파도처럼. 지구가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 환경의 황폐화가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 넘쳐나는 지금의 삶에서 우리는 얼마나 인간다운 삶을 더 영위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 중 인간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은 선택하는 것이, 그 선택을 위해 무수히 많은 다른 생명체들의 삶을 짓밟고 외면하는 것이 과연 최선의 선택인지를 '수라'는 묻는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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