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취재팀, 1940년 무렵 해녀 시네마현 오키섬 현지서 "울릉도 남편과 물질 생활 이어갔다"는 증언 확보 주목 "업무량 남들보다 두배 이상"… 전복·소라 가공·판매 다케시마 역사관엔 독도해녀 흔적있지만 상세기록 없어 [한라일보] 제주해녀의 독도 진출은 1930~1940년대 일본인에 의해 고용되면서 이뤄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독도 어장 어업활동은 일본 시마네현의 오키섬에서 어민들이 독도를 찾아 강치(바다사자) 포획과 전복 성게 등을 채취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본보 특별취재팀은 과거 일본인들에게 고용돼 독도 어업활동에 나섰던 제주 해녀들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일본 시네마현의 오키섬 현장 취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현지 증언을 통해 울릉도 출신 남편과 바다건너 오키섬으로 넘어와 물질을 이어갔다는 해녀의 이야기를 국내 언론 최초로 확보했다. 1940년대 김평순씨와 그의 부인이 함께 일했다는 수산물 가공공장. 이태윤기자 다케시마 역사관에 게시된 일본 어업인과 고용된 해녀(오른쪽 4명)의 모습. 이태윤기자 ▶오키섬 다케시마 역사관 속 해녀의 흔적=오키섬 다케시마 역사관에는 제주해녀의 기록이 남아 있다. 역사관에는 과거 오키섬에서 독도로 어업에 나선 어부들의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는데, 전시된 사진속에는 여성 4명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사진설명에는 독도에서 어업활동 벌인 어부들과 언론기자들이 독도해안에서 촬영한 단체사진이라는 설명과 함게 일본 어업인에게 고용된 한국해녀들이 찍혀 있는 것이 특징적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역사관 내에는 과거 일본어업인이 독도 조업 수지계산서도 게시돼 있었는데 해당 내용 중에는 해녀의 수입과 관련한 내용도 게재돼 있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일본어업인이 1935년 5월 20일부터 7월 10일까지 두달이 채 안되는 기간 독도에서 강치 29마리를 포획해 일본 엔화로 4060엔(마리당 140엔)을 벌여들였다. 이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030만엔으로 명시돼 있었는데 이는 한화로 약 1억8300만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특히 이 기간 지출부분을 보면 인건비로 어부 13명이 총 1300엔(현재가치 650만엔, 한화 약 5880만원)을 받았는데, 해녀 4명에게는 총 600엔(현재가치 300만엔, 한화 2700만원)을 지급했다고 나와있다. 이를 통해 당시 어부 1명의 인건비는 100엔, 해녀 1명의 인건비는 200엔으로 해녀가 일본 어부보다 더 높은 임금이 책정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어업인들에게 고용된 해녀들은 전복을 채취했는데 당시 두달이 채 안된 기간 전복을 통해 얻은 수입은 800엔(현재까지 400만엔, 한화 약 3600만원)이었다. 다만 이 기간을 끝으로 일본 조업인의 수지계산서에는 해녀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해녀의 고용은 일회성으로 이뤄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취재팀은 이들 해녀들의 고용이 어떠한 방법으로 이뤄졌는지에 대해 오키섬 정청(관아)을 찾아 수산부 관계자에게 문의했다. 정청 관계자는 "해녀에 대한 기록은 해당 기록이 전부이며 관심을 갖지 못한 분야이기 때문에 해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즈노리씨가 A4용지에 김평순씨의 이름을 직접 쓰면서 당시의 생활을 증언했다. 이태윤기자 ▶오키섬 해녀=취재팀은 일본 현지 취재과정에서 오키섬에도 과거 해녀의 물질이 이뤄졌다는 주민의 증언을 국내 언론 최초로 확보했다. 오키섬 서북쪽 고카이촌 구미마을의 구미항. 이곳은 과거 독도에서 조업을 벌인 일본 어민들의 주요 출항지였다. 본보 취재팀은 과거 오키섬에서 해녀가 물질을 벌였다면 독도로 향하는 주요 출항지였던 구미항에서 거주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했다. 이에 구미항 주민들에게 해녀의 존재 여부를 물으며 발자취를 쫓았고, 결국 수소문 끝에 해녀를 기억하는 야와타 가즈노리(94)씨와 만날 수 있었다. 가즈노리씨의 기억에 따르면 오키섬의 한인 부부는 1940년쯤에 울릉도에서 배편을 이용해 오키섬으로 넘어왔다. 그 당시 울릉도에서는 제주해녀가 주축을 이뤄 물질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에 김씨의 부인은 제주해녀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가즈노리씨는 남자의 이름을 '긴조'(김평순·金坪順)로 기억했고, 그의 부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 특히 김평순씨의 부인은 섬에서는 유일하게 바다에서 전복 등 수산물을 채취해 판매하며 큰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이들은 구미항 내에 있는 수산물 가공공장에서 일하며 고정수입으로 생계를 이어갔는데, 전복껍질과 소라껍질은 가공해 단추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취재팀은 오키섬 구미마을 주민들에게서 과거 해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태윤기자 독도해녀 취재팀은 시마네현 오키섬에서도 해녀가 물질을 벌였다는 증언을 확보함에 따라 오키섬 인근 수중 생태계 조사에 나섰다. 이태윤기자 오키섬 인근 바닷 속 해양생태계 모습.이태윤기자 가즈노리씨는 "당시 김평순의 부인은 남들보다 두배는 일을 잘했는데 물질도 잘해 그에 대한 기억이 뚜렷하다"면서 "그들 부부는 우리 가족과 서로 음식도 나눠 먹는 등 어려운 시기를 의지하며 친하게 지냈다"고 말했다. 이후 김평순과 그의 부인은 1970년쯤 오키섬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오사카로 이주했고 이후 연락이 끊겼다. 그러던중 2014년쯤 김평순씨는 자식들과 손주들과 함께 오키섬의 구미마을 방문해 가즈노리씨와 안부 인사를 하는 등 섬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오사카로 돌아갔다. 가즈노리씨는 "김평순이 몇십년만에 다시 구미항을 방문했을때 반가워 서로 부등켜 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면서 "아쉽게도 김평순 가족이 이곳을 찾았을 당시에는 그의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이태윤 정치부차장·강다혜기자>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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