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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3) 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⑥색달동 냇서왓(천서동)
파괴·재건·이주 되풀이… 화전 마을 '흥망성쇠' 간직
이윤형 백금탁 기자 hl@ihalla.com
입력 : 2023. 09.21. 09:34:35
4·3으로 마을 불타고 이후 재건
개발 바람 속 다시 잊혀진 마을
폐허처럼 남은 돌담집·올레…


주민 떠나도 비극의 역사 '생생'
실태조사·기록화 작업 서둘러야


[한라일보] 정글처럼 빽빽한 삼나무림 속에 뼈대만 남은 집터가 숨겨져 있다. 취재팀이 찾은 냇서왓 화전 마을은 강한 햇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도 음습함이 밀려왔다. 제주4·3사건 와중에 집들이 불타고, 이후 재건됐다 다시 잊혀지기를 반복한 마을 역사가 온 몸으로 느껴진다.

서귀포시 색달동에 위치한 냇서왓은 제주의 비극적 역사와 개발 바람 속에 기구한 운명을 겪은 화전 마을이다. 숱한 고난과 비극의 역사뿐만 아니라 외지 자본에 의해 마을 공동체가 위협받고 해체되는 '바람타는 섬' 제주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상징하는 마을 중 하나다.

냇서왓은 색달동 본동에서 북쪽으로 3.5㎞ 정도 떨어져 있다. 한자로는 '천서동(川西洞)'이다. 천서동은 '냇새왓모을' 혹은 '냇서왓모을'의 한자차용 표기이다. '막은 다리' 북서쪽에 있는 내(川)와 내 사이의 '밧(밭)'이라는 뜻이다.

정글같은 숲속에 폐허처럼 남은 냇서왓 마을터를 취재팀이 조사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서귀포시 산록도로에서 색달동 방향으로 냇서왓으로 가는 천서동 길이 나 있다. '천서동 길'은 천서동에서 '머구낭 동산(색달동 750-1번지)' 까지 나 있는 색달마을을 남북 종단하는 길이다. 이 길을 통해야 공동묘지 출입과 목장 출입이 가능하다. 이 길은 골프장을 관통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 천서동 길을 따라가면 현무암에 새긴 '냇서왓 흔적비'(川西洞 痕迹碑)가 나타난다. 흔적비는 2005년 색달마을 주민 일동이라고 돼 있으며 건립은 (주)롯데골프장이, 글은 냇서왓마을 후손이 썼다. 흔적비에는 냇서왓의 흥망성쇠가 함축돼 있다.

냇서왓에는 1850년대 초부터 진주 강씨, 양천 허씨, 청주 한씨, 김해 김씨 등 40여세대가 씨족을 이루어 목축과 화전을 하며 살았다. 주작물로는 지슬, 메밀, 마시리조, 봉개시리조, 산듸, 팥 등 산성토양에 적합한 작물을 재배했다. 수확한 작물은 해변 마을과 쌀, 보리 등으로 물물교환하며 생활을 이어갔다. 주민들은 한 집안 식구처럼 살았다. 그러던 중 1948년 4·3사건이 일어나면서 그해 음력 10월 11일 마을이 불타고, 강제 소개령으로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마을은 폐허가 됐다. 이후 1962년 주민들 25세대가 정부 융자금으로 이곳에 집을 짓고 마을을 재건하였다. 원래 냇서왓 마을보다는 다소 아래쪽이다. 그렇지만 쉽게 잊혀지지 않는 4·3의 상흔에다 개발바람으로 땅이 팔려나가면서 주민들은 하나 둘 떠나고, 다시 잊혀진 마을이 됐다.

지붕이 사라진 돌담집. 앞쪽에는 물통이 있다. 특별취재팀

허물어져가는 돌담집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특별취재팀

삼나무와 대나무, 잡목이 울창한 숲속에는 주민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곳에는 1960년대 이후 재건된 현무암 돌담집들이 천서동 길 좌우로 7~8곳 정도 확인된다. 대부분 지붕은 사라지고 벽체만 남아있다. 이 중 집 2곳의 규모는 정면 각각 11m, 8m 정도, 본체 너비는 4m에서 5m 안팎이다. 방 2개, 마루, 부엌 등으로 비슷한 구조다. 재건 당시부터 제주의 전통 가옥구조에서 보이는 '밧거리'(바깥채)는 없이 '안거리'(안채)만 지은 것처럼 보인다.

마당에는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한 통시가 있다. 이러한 통시는 지금은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사라졌다. 우영밭, 올레도 볼 수 있다. 집집마다에는 안거리 붙어서 공통적으로 물통이 있다. 중산간 지역 특성상 물을 얻기가 쉽지 않은 탓에 빗물을 모아서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수도꼭지까지 남아있는 곳도 있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생활했던 집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떠나고 대신에 냇서왓 옛 마을터에는 삼나무가 빽빽이 들어섰다. 이곳 삼나무에도 사연이 있다. 마을을 재건한 이후 주민들은 당시 관으로부터 소득사업으로 한그루 당 15원을 받고 삼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마저도 시들해지자 다들 색달 본동이나 중문 등지로 내려갔다. 이후 옛 마을터는 삼나무 정글이 되어버렸다. 제주에서 삼나무의 본격적인 조림은 1970년대 초반부터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림잡아 50년 되는 삼나무들이다.

냇서왓에서 태어나 어릴 적 그곳서 자랐다는 색달동 주민 허씨(84세)에 의하면, "천서동 본동인 '모라이악' 일대는 대부분 산성토양이라 메밀, 마시리조, 봉개시리조, 산디(밭벼), 팥, 지슬(감자) 등 주로 산성토양에 적합한 작물들을 재배했다. 이 마을에서 재배가 어려웠던 '곤쌀'이나 보리 등은 아랫마을, 색달이나 중문지역에 가서 메밀이나 조와 물물교환을 했다"고 한다.

거의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제주의 전통적 돼지우리인 통시. 특별취재팀

냇서왓 흔적비. 특별취재팀



진관훈 박사(경제학)는 화전마을인 냇서왓에서는 메밀이 '효자 작물'이었다고 했다. 메밀은 메마른 산성토양에서도 잘 자라고, 병충해 피해도 적은 편이며 잡초도 거의 없어 한 번 제초하거나 안 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게다가 생장 기간이 상당히 짧다. 예전 천수답 농사에는 전작 작물이 흉작이다 싶으면 바로 작물을 갈아엎고 구황식물을 심었는데, 그런 구황작물 중 하나가 메밀이었다.

'모라이악' 일대에 걸쳐있던 냇서왓은 인접한 '모롯밧(백록동)'과 '오리튼물', 그리고 색달천 '가라리내' 동쪽 '녹하지악 일대 상문리(上文里)' 화전민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중산간 지대 옛 화전마을들은 지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이루며 서로 긴밀히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진 박사는 "향후 화전마을 문화 연구는 이러한 전제에서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즉, 개별적이고 고립적인 산촌(散村)문화가 아니라 한라산 중산간을 둘러싼 공동체적인 제주 산촌(山村) 문화로서의 위상을 발굴하고 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냇서왓은 중산간 화전 마을이 제주에 휘몰아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어떻게 영영 사라지게 됐는지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화전 생활상뿐만 아니라 4.3과 개발붐에 해체되어간 마을공동체 역사까지 담고 있는 현장이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실태조사나 기록화 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어 마을공동체 현장이 사라질 우려를 낳고 있다. <특별취재팀=이윤형 편집국장·백금탁 제2사회부장> <자문=진관훈 박사·오승목 영상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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