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완 씨가 제주어를 담아 그린 자신의 작품을 들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미술교사인 그는 "그림은 한 번 그리면 남는다"며 제주의 옛 풍경, 기억이 담긴 그림을 이어 가고 있다. 강희만기자

선생님 칭찬으로 재능 키운 아이
미술교사로 의미 있는 활동 이어
제주어 담은 '풍속화' 선보이기도
"삼대가 소통하는 촉매제 되기를"


[한라일보] 아기가 구덕 안에서 곤히 잠을 잔다. 멀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어미의 표정이 편안하다. 고된 일에도 얼굴엔 땀 대신 웃음이 흐른다. '우리 어멍 검질 메당 나신디만 베렷닥베렷닥.' 손수 그린 그림에 고용완(58, 제주시) 씨는 이렇게 적었다.

|그림 잘 그리던 아이, 미술교사로

그림을 좋아하던 아이였다. 초등학교 시절 만화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레 그림 그리기로 이어졌다. 친구들에게 그림 한 장 그려주고 받은 연습장 종이를 모으고 모아 자기만의 만화책을 만들었다. 용완 씨는 "그렇게 만든 만화책을 보여주고 또 종이를 받으면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재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 덕이었다. 그는 "칭찬으로 잘 성장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학교 행사가 있거나 수업 자료를 만들 때 그림이 필요하면 선생님들은 용완 씨를 찾았다. 교과서 여백에 그림 그리기를 즐기던 그를 혼냈던 아버지도 그런 모습에 재능을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그림에 대한 관심은 학창 시절 내내 이어졌다. 자연스레 미술교사를 꿈꾸게 됐다. 하지만 1984년 미술교육과로 대학에 들어가고 1992년 졸업할 때까지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보다' 했을 때, 10년 만에 제주에서 미술교사 5명을 뽑는다는 공고가 떴다. 1995년의 일이었다. 용완 씨는 농담처럼 "서른 넘어 운 좋게 교직에 들어오게 됐다"며 웃었다.



|제주어가 준 감동… 콘텐츠로 주목

필연처럼 들어선 교직 생활이 올해로 29년째다. 그간의 시간을 돌이켜보며 그는 "즐거웠다"고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미술교사로 참여했던 모든 일이 의미가 있어서다. 1998년부터 약 20년 가까이 맡아왔던 지역 교과서 만들기, 제주어 교육 자료 만들기 등이다. 이들 교재에는 모두 용완 씨가 그린 그림이 삽화로 실렸다. 그가 제주어를 담은 작품을 잇게 된 데에도 이러한 활동이 영향을 줬다.

분명한 계기는 있었다. 2013년쯤 도내 한 고등학교에 근무하던 때였다. 캘리그래피(멋 글씨)를 주제로 수업을 하던 당시, 한 학생이 그를 찾아왔다. '선생님, 오늘이 엄마 아빠 결혼기념일인데, 그림 하나만 그려주시면 안 될까요?' 곧바로 종이 한 장을 집어든 그는 제자를 대신해 간단한 그림과 함께 메시지를 담았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우리 어멍 우리 아방'.

다음 날 그 제자가 다시 용완 씨를 찾았다. "얼굴이 벌겋게 돼서 달려온 학생이 말하더군요. '선생님 어제 엄마 아빠가 감동해서 막 울었어요'라고 말입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주어를 가지고 다듬어 콘텐츠를 만들면 뭔가 될 것 같다고요."

그는 그때부터 제주어를 담아 그림을 그렸다. 한 장 한 장 쌓아나가기 시작한 게 벌써 440호를 넘어섰다. 처음에만 해도 500호를 채우고 다른 주제로 넘어갈까 했지만, 그리면 그릴수록 또 다른 제주어, 묻혀 놨던 옛 기억, 정서가 떠오른다는 그다. "새로운 단어와 문장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한다"는 용완 씨의 수첩에는 아직 작품으로 표현되지 않은 제주어가 빼곡히 적혀 있다.

미술교사인 고용완 씨가 제주어를 담아 그리는 '풍속화'. 신비비안나 기자

|"삼대가 보며 이야기 나눌 수 있길"

용완 씨가 "듣고 봤던 것, 경험했던 것"을 담은 작품은 그 시대를 함께 살아온 이들에게 옛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식겟반을 테우고(제사 음식을 나누고), 허벅에 물을 긷고, 경운기에 시동을 살리던 풍경까지 모두 작품의 소재가 됐다. 4·3 당시를 떠올리듯 야밤에 불타는 마을을 뒤로 하고 피난 가는 사람들 그림에는 '웨지말앙 속솜'이라는 제주어가 적혔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작품에 '신 풍속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많은 사람들이 '만화'라고 부르지만 저는 아니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풍속화가인) 김홍도, 신윤복 그림과 같은 '풍속화'라고 감히 장르를 정했습니다. 그림 소재를 주로 70~80년대쯤으로 잡고 있는데, 지금은 없어진 문화가 많습니다. 그런데 소리는 없어져도 그림은 한 번 그리면 남습니다. 시간이 지나서도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까지 삼대가 보면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촉매제가 됐으면 합니다."

그의 작품에 담긴 제주어는 완벽하진 않다. 정확한 표기법이 아닌, 소리로 기억하는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경우가 많아서다. 그가 2019년 전시회를 열 때 주변에서 걱정했던 것도 이 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전시회에 찾았던 제주어 학자도 '표기법 잘못'을 거론했다. 그때 용완 씨는 이렇게 되물었다고 한다.

"그때 제가 여쭤봤습니다. '표기법이 틀렸으니 전시를 안 하는 게 낫겠습니까, 아니면 표기법이 약간 틀려도 하는 게 낫겠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시어라는 게 있는 것처럼 그림 그리는 사람의 제주어로 귀엽게 이해해 주십시오'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교수님이 웃으시면서 '하는 게 낫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안내문을 통해 표기법이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전달하고 전시를 진행했습니다."

고용완 씨는 "제주어에는 제주만의 정서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신비비안나 기자

|"제주어, 지켜야 할 이유 분명"

당시의 기억은 제주어 표기까지 더 신경 쓰게 했다. 지난해 그가 제주어보전회의 제주어 기본교육과정을 이수한 것도 그래서다. 제주어를 더 정확히 알고 작품에 담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는 표기법만큼이나 제주어를 자주, 많이 노출하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용완 씨는 "버스정류소마다 붙어있는 제주어 속담을 보면 표기가 잘못된 부분도 있지만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면서 "(제주어를 보전하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많이 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주어를 소재로 하는 그림이나 노래, 연극 작품들이 일반인들의 생활에 녹아들어 갔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그가 말하는 제주어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전 세계 어느 나라말보다 "독특한 언어"인데다 "제주만이 갖고 있는 정서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제주어는 억양에 따라서도 전달되는 내용과 감정이 달라집니다. 정말 독특한 언어이지요. 그런 만큼 꼭 지켜내야 합니다. 제주도청과 교육청이 많은 예산을 들여 제주어를 장려하고는 있지만, 그걸 받아들이고 쓰는 사람들은 점점 없어지고 있습니다. 아직도 제주어를 쓰는 사람을 개그맨 보듯이 희화화하는 문화가 남아 있는 게 아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의 이 말은 우리 모두가 제주어를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소멸 위기에 놓인 제주어를 살리기 위해 주문처럼 외는 바람 같기도 했다. 다가오는 9일은 '제577돌 한글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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