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병의 물을 갈며*-나희덕 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나는 꽃이 시들까봐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물을 갈아주는 나는 산 것들을 살게 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들을 바로 눈감게 하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도 조간신문 위에는 십오 세의 소년이 수은 중독으로 실려 나가고 그 기사에 우리는 잠시 놀란 얼굴이 될 뿐 오히려 그 위에 피어난 꽃을 즐기고 있구나 *「꽃병의 물을 갈며」 부분 삽화=써머 우리는 '꽃'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문자 바깥에 있을 수 있다. 시인이 선택한 '꽃'은 자유롭고 많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문자를 통한 말하기와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지고 미완성된 글, 다 하지 못한 말은 살릴 수 없는 죽은 것이 되어버린다. 꽃을 꺾지 않는다거나 개미를 밟지 않도록 주의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이 생명 존중에 대한 마음에서 기인할 수 있고 전혀 다른 데서 비롯될 수도 있다. 본디 생각이라는 게 꼭 남의 눈에 띌 정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시인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꽃병에 물을 갈아주는 관심을 문득 수은 중독 소년으로 상징되는 어려운 사람, 밑바닥 삶에 놓여 있는 타자에 대한 관심과 비교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시 마지막 연에서 현실 세계의 인간이란 밑둥이 잘리우고 줄기가 꺾인 채 "모두 꽃병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본주의의 꽃"으로 인지하고, 거기서 우리의 정지와 죽음을 차용한다. 그러면 꽃도 우리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물병의 '꽃'에 대해 그 정도까지 이야기한 셈이다. 작은 얘기가 아니다. <시인>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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