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은 장독 위에 내리고-허충순 바람이 지나가면 살짝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시야가 시나브로 흐려지는 눈발 속에서 눈꺼풀을 내리는 사랑이 있다 달이면 맛이 진해지고 색이 좋아진다고 해서 내 말과 말투를 달이고 사랑도 마음도 고여 있는 것은 마르지만 독 속에 있으면 묵으면서 환생을 한다 했지 오늘도 시간은 눈밭에 녹초를 그리듯 한 발자국씩 오고 마른 풀을 그리듯 한 발자국씩 간다 독의 가슴에는 당신이 눈 내리듯 쌓이고 눈 녹듯 박힙니다 삽화=써머 어머니의 장독대엔 간장, 고추장이나 된장독만 아니라 김칫독, 씨앗독, 쌀독, 젖독 등등이 있었다. 그 속에선 담긴 내용물들만 시간을 견디는 게 아니라 독도 균열과 훼손을 피할 수 있어야 했다. 어머니가 담군 장과 함께 독이 얼마나 오래 눈비에 젖었는지, 얼마나 많은 바람이 쓸고 지나갔는지, 누가 장을 얼마만큼 얻어갔는지 가버린 시간은 알고 있으려나. 독 속에선 장들이 묵어가며 익어가며 "환생"을 경험하고 있을 때 어머니 집엔 어머니가 침묵하고 옆집 어머니가 침묵하고 그 옆집 어머니가 또 침묵하고 그 위에 눈과 비는 내리고 눈의 흰 마스크를 쓴 한 장독이 침묵하고 눈의 흰 마스크를 쓴 다른 장독들도 침묵하던 옛날의 장독대. 제 스스로 느끼기 전엔 자신이 무슨 독인지 알 수 없는 독들도 있었겠다. 늙어가는 몸에 갈잎을 그리듯 매화점을 찍듯 독백과 침묵 사이에서 장이 다 덜어질 때까지 못 본 척 못 들은 척 묵묵히 사셨던 어머니. <시인>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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