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지난 회에 서술한 대로 1923년 2월부터 제주도와 오사카를 직항하는 전용기선의 항로가 처음 열렸다. 맨 먼저 오사카행 배를 띄운 주체는 제주의 토착자본가들이 세운 제우사 기선부와 제주상선주식회사였다. 그러나 제우사는 자본력의 열악함 때문인지 작은 기선을 운항시키다가 8월 이후 제주상선에 통합되었다. 제주상선 또한 1924년 이후 일본자본 아마사키기선과 제휴하여 제주도 항포구의 거룻배를 운영하는 하청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고산-용수 해안에 좌초된 제1군대환. 사진 原口利 소장 아마사키기선을 제주-오사카 항로에 참여토록 움직인 인물은 조천리 출신의 김병돈이었다. 그는 조천공립보통학교의 설립에도 기여한 바 있는데, 일찍이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서 '조선인구제회'를 조직해 일본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권익 수호 활동을 했다. 그는 아마사키기선과 제주상선과의 협력을 이끌어 직항로 개설을 주선했다. 1925년 9월 12일 자 동아일보 기사 군대환은 일본어로 '기미가요마루'로 불렸다. 기미가요[君が代]는 일본 국가(國歌)로, '천황 통치가 천년만년 이어지리라'며 일왕 치세가 영원하기를 염원하는 내용이다. '기미'는 곧 일왕을 지칭한다. 이 배를 탔던 제주인들이 일왕을 숭배하는 이름의 군대환을 어떻게 인식했을지 궁금하다. 아마사키기선의 제2군대환. 사진 原口利 소장 제2군대환의 모체인 러시아 군함 만주르호. 출처 https://teameye.tistory.com/468 조선우선의 함경환. 출처 jpnships.g.dgdg.jp 조선우선의 경성환. 출처 일본기선건명록 창업 당시 조선우선이 보유한 선박은 기선 26척과 범선 1척으로서, 부산, 목포, 인천과 제주도를 연결하는 노선을 독점적으로 운항했다. 조선우선이 본격적으로 조선에서 일본 오사카·고베로 가는 한신[阪神]항로를 개척한 시기는 1920년대였다. 조선우선 측은 한신항로 중에서도 1923년 개설된 제주-오사카 직항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취항을 준비했다. 조선일보 기사(1923년 8월 23일 자)에는 '조우 암중 비약(朝郵 暗中 飛躍)'이라는 제목 아래 제주도 산지와 성산포 회조부를 중심으로 제주인들의 의견을 들어서 운항 동의 서명을 받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결국 조선우선은 1924년 2월 제주-부산-오사카 항로에 함경환(咸鏡丸)을 출범시켰다. 1912년에 매입한 함경환(802t)은 원래 원산-청진 항로에 취항 중이다가 이때 제주-오사카 항로에 투입되었다. 1924년 5월에는 기항지에 목포를 추가하여 제주-목포-부산-오사카 노선을 2주에 1회 왕복 운항하기 시작했다. 1924년 조선우선은 근해항로에 적당한 1천t급 이상의 선박을 다수 구입하면서 경성환(京城丸, 1033t, 정원 338명)을 매입했다. 경성환은 함경환이 운항하던 원산-청진항로에 대신 취항하다가 1926년부터는 제주-오사카 항로에 투입되었다. 이때로부터 1932년 함경환이 매각 처분될 때까지 2척이 함께 운항했다. 경성환은 조선우선이 경영상의 문제로 1935년 4월 25일 제주-오사카 항로 운항을 중단한 뒤 휴항하다가 같은 해 8월에 매각되었다.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역사학자) 이제 192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제주인들의 자각과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제주도기선(영보환), 기업동맹(순길환), 동아통항조합(교룡환, 복목환) 등 우리 배를 띄우려는 움직임이 태동하게 되었다. 제주인들이 주인이 되는 자주운항의 맹아가 생겨난 것이다. 다음 회부터는 본격적으로 자주운항운동에 대한 글을 이어갈 것을 기약한다.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역사학자)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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