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기말의 사랑' [한라일보] 우리는 지치지도 않고 외롭다. 삶이 매일 이어지는 것처럼 외로움의 명줄도 그와 같나 보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어디에서든 무언가를 그리워하다 보면 기어코 사랑으로 여겨지는 어떤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그렇게 '징조'를 발견한 다음에 우리는 알을 품은 새처럼 조심스럽고 강한 존재가 된다. 내 사랑이 깨지지 않고 부화하게 만들려면 나는 필시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화한 사랑의 모양이 어떨지는 짐작할 수가 없지만 부화의 온도를 유지하는 내내 품은 이의 마음은 미덥게 뜨겁다. 사랑의 모양은 두 사람이 서로를 부둥켜 있는 모양만은 아닐 것이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조심스럽게 품은 모양 또한 사랑의 모양이 아닐 리 없다. '69세'를 연출한 임선애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 '세기말의 사랑'은 1999년 세상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던 수상한 날들에 한 남자 도영에게서 사랑의 징조를 발견한 여자 영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무성 영화를 연상하게 만드는 흑백 화면 속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 영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는다. 줄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가진 게 적다고 사랑이 적을 리 만무하다. 징조를 발견한 영미의 사랑은 품 안에서 점점 더 커진다. 불행은 영미 곁에 도사리고 있다가 염증처럼 솟아나고 고름처럼 터지지만 어쩐지 품고 있는 이 사랑을 입 밖으로 꺼내 터뜨리는 일은 쉽지가 않다. 세상이 망할지도 모르는 세기말의 끝에서 영미는 끝내 품었던 사랑을 상대인 도영에게 온 힘을 향해 던진다. 그런데 세상은 망하지 않았고 쏜 사랑이 가 닿은 곳에는 머물 자리가 없다. 대신 밖으로 나온 영미의 사랑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하고 세기말이 새천년으로 바뀌는 찰나에 태어난 영미의 사랑은 신묘한 지점에 이르러 만개한다. '세기말의 사랑'은 도영을 사랑한 영미의 이야기이자 도영을 사랑한 유진의 이야기인 동시에 이 이상한 징조들을 온몸으로 부딪혀 각자의 모양으로 빚어낸 영미와 유진의 이야기다. 도영과의 사랑이 무산된 뒤 사랑을 위해 감옥까지 갔던 영미는 출소하자마자 도영의 아내 유진과 조우한다. 유진은 영미에게 미지의 영역이다. 내 사랑의 사랑이었다는데 자신과는 모든 것이 다르다. 엉거주춤인 자신과는 다르게 모든 것이 다짜고짜다. 영미는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대상인 유진과 도영이라는 사랑의 끈으로 엉키기 시작한다. 갈 곳도 맘 줄 데도 없어진 영미는 몸이 불편한 유진의 손발이 되기로 마음을 먹고 그때부터 유진의 시야에서 자신을 보고 자신의 손으로 유진의 마음을 더듬기도 한다. '세기말의 사랑'은 황지우의 시구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라는 말을 비트는 영화다. 이를테면 '폐허인 자리마다 내 사랑이 움텄다'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폐허와 파국과 비극과 불행 위에도 기어코 흘러든 사랑의 씨앗들이 어떻게 자리를 잡고 어떤 모양으로 피어나 어떤 향기를 풍기는지에 대해 골몰하는 영화가 '세기말의 사랑'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랑의 꽃인 맨드라미는 한 눈에는 한 장의 꽃잎 씩으로 구분하기 어렵다. 붉게 뭉쳐있는 모양새가 한 덩이로 보이는 꽃이다. 눈이 아니라 손으로 더듬어야 그 실체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맨드라미는 영미와 유진이 몸과 맘으로 부딪혀 식별해 낸 그들의 사랑의 모양과도 닮아있다. 세기말의 심상치 않은 징조들이 부화한 결과가 심장처럼 붉은 덩이꽃의 개화라니. 이 수상한 치정극은 이렇게 '시들어도 기억될 사랑'이라는 지점에 이르러 뿌리를 내린다. 또 다른 꽃이 언제든 필 수 있을 것이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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