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회 4·3추념식이 거행된 3일 제주4·3평화 공원 내 행방불명인 묘역에 유족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제주도사진기자회 [한라일보] "이제는 하도 세월이 흘러서 오빠 얼굴이 잘 기억 안 나. 하지만 나를 예뻐해 줬던 것 하나만큼은 아직까지 기억하지. 오빠의 시체도 못 찾았으니. 4·3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져." 제76회 4·3추념식이 거행된 3일 제주4·3평화공원. 4·3 당시 희생된 오빠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김경인(84·제주시 아라동)씨는 행방불명인 표석 앞에서 연신 발을 동동 굴리며 오빠의 이름을 찾았다. 그는 오빠의 이름을 발견하자마자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가방 한가득 가지고 온 떡과 과일 등을 꺼냈다. 이내 술도 한 병 꺼내든 김 씨는 눈을 꼭 감으며 갈수록 희미해져만 가는 오빠를 추억했다. 그는 "오빠가 22살이고 내가 9살 때 일이었다. 토벌대가 오빠를 정뜨르 비행장으로 끌고 가 총을 쐈다"며 "오빠가 죽지 않자 옷을 벗기고 또 한 번 총을 쐈다더라. 그래도 오빠는 살아서 밤에 몰래 인근 동네까지 기어 왔다"고 말했다. 이어 "소식을 들은 가족들이 서둘러 오빠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가족들이 도착하기 전에 오빠는 또다시 토벌대에 붙잡혔고, 결국 이날 이때까지 오빠를 다시 볼 수 없었다"고 했다. 김 씨는 "유족들에게는 하염없이 아픈 기억들 뿐인데 아직까지 4·3을 폄훼하려는 이들이 있어서 마음이 아프다"며 "국가적으로 더 이상 4·3의 논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3일 제76주년 4·3희생자 추념식 봉행에 앞서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묘역에서 한 유족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제주도사진기자회 아내와 함께 이곳을 찾은 김명인(89·제주시 애월읍)씨는 각명비 앞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하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김 씨는 "양민증을 줄 테니까 나오라는 경찰의 말에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집을 나섰던 아버지는 애월과 한참 떨어진 사라봉 인근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며 "그때의 아버지가 향년 36세였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아버지보다 내가 훨씬 나이 들어버렸다"고 눈물을 흘렸다. 이어 "2년 연속으로 대통령이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며 "일이 바쁜 것은 알지만 그래도 올해는 직접 유족들 앞에 나서서 위로의 말을 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4·3희생자인 아버지의 각명비를 찾은 김명인씨와 아내.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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