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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정의 하루를 시작하며] 한 땀 한 땀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입력 : 2024. 08.27. 22:00:00
[한라일보]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은 날다 어디서 쉴까. 덕수궁 뜰은 여름이 한창인데 그지없이 쾌청해, 풍경 그대로 고운 자수 결이다. 미술관에 걸린 자수 작품들은 기대 이상이었다. 어떤 예술품 못지않은 정교함과 공듦이 느껴져 감탄을 거듭한다.

'작은 말 한마디 넘쳐흘러 듣는 이는 누구나 추측했다. 열정이라고, 또는 눈물이라고.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흘러, 전통이 성숙하여 쇠퇴하니 웅변인 듯하다.' 입구에 걸린 에밀리 디킨슨의 글귀는 멋진 프롤로그였는데, 나오며 다시, 에필로그로도 충분하다. 바늘을 도구 삼아 다채로운 색실로 직물을 장식하는 자수는 오랜 인류 문화유산 중 하나다. 훼손되기 쉬운 재료 특성상 남겨진 유물 수가 지극히 적어, 전통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지점부터다.

백번을 단련한 바늘은 작은 구멍 하나 내어 실오라기 한 올을 걸고 바늘 길을 연다. 한 몸 된 바늘과 실은 바탕천의 바닥을 뚫고 나가, 오간 길을 더듬어 되돌아와 겨우 한 땀을 얻고 다시 나가고 돌아오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이렇게 점과 선으로 이룬 면 하나, 갸륵하다. 고작 티끌쯤인 첫 한 땀이 결국 제 마음에 그린 대로 될지 바늘 쥔 그는 알았을까. 가는 길, 허투루 접어들지 않는다면 뒤까지 더욱 정갈하리라.

더러 서툰 솜씨에 감각이나 취향이랄 게 딱히 없더라도, 흐릿한 영감에 재료와 꼭 맞는 자수가 아닐지라도 노동과 교과목의 산물로, 끝내 수많은 손을 거쳐 향기로운 작품이 됐다. 구상한 것에 정성을 보태 일상용품과 의복에 공양과 의례의 무늬를 넣거나, 오로지 감상을 하자고 그림이 된다. 꽃씨 한 톨, 깃털 하나, 물방울 한 알, 장대한 뜻을 담은 한 획도 한 땀에서 시작된다. 자수는 긴 서사와 시간, 작은 바람과 염원, 손끝의 고됨 등 많은 것들이 응축된 시각언어다. 오랜 날 여러 층위의 실들이 엉켜, 자유분방한 구도와 강렬한 원색 대비, 혹은 정제되고 숙련된 고아한 기품을 얹는다. 단 한 조각도 마침내 예술이다.

필사로 묶은 성경이 있다. 수전증을 앓고 있는 아버지는 2년여에 걸쳐 백내장 수술을 거치면서도 위태로운 손을 꿋꿋이 세워 전편을 옮긴다. 보통 성경의 세 배는 됨직한 두께다. 신께 드리는 경배와 더불어 사랑하는 딸에게 준다는 표지 말에 오래 뭉클했다. 투병 중에 완결한 그 어르신의 성경은 말씀 그대로가 가진 귀함에서 이미 보배지만 한 땀 한 땀 일궈낸 작품이어서 더없는 감동이다.

시작점과 끝에 한 땀 아닌 것들이 있는가. 계절 따라 차츰 피어나는 꽃잎과 녹음, 짙어가는 단풍과 낙엽, 기어이 헐벗음. 쌓이던 눈발과 고요한 해빙. 아이들의 키 자람 눈금. 블록 쌓기와 도미노. 곰팡이와 소금 한 꼬집의 힘. 무너지는 뚝, 번지는 들불. 찬란한 문화와 쇠락의 역사. 한 땀은 한 바늘이다. 한 땀은 수고로움 한 방울이다. 한 땀 한 땀 부침을 무릅쓰고 거침없이 바람대로 그리 갈 일이다. <김문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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